tvN의 예능 '방과후 태리쌤' 포스터 이미지. 경북 문경의 한 초등학교에 배우 김태리가 연극 교사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tvN 제공>
#1 직장인 방미성(54)씨는 퇴근 후 TV를 켜지만, 스릴러·서바이벌 장르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 긴장감 있는 작품은 재미있지만 보고 나면 더 피곤하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예능 '방과후 태리쌤'을 즐겨보고 있다. 전교 학생이 18명에 불과한 경북 문경의 한 초등학교에 배우 김태리가 연극 교사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특별한 사건은 없지만, 따뜻한 일상과 인물의 감정선을 엿볼 수 있어 오히려 위로가 된다고 했다.
#2 대학생 이민정(23)씨의 유튜브 시청 목록도 비슷하다. 한때는 강한 리액션 영상 위주로 봤지만, 최근엔 '브이로그'(자신의 일상을 주제로 찍은 동영상) 같은 일상 기록 콘텐츠를 주로 찾는다. 이씨는 "크게 웃기거나 놀라운 건 없는데,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며 "소란스러운 세상에 집에서만이라도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사회에서 '순한 맛' 콘텐츠가 뜨고 있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시대가 도래하며 '도파민'을 내세운 자극적 방송이 유행했지만, 이에 대한 피로감으로 최근에는 편하게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주목받고 있다.
tvN의 예능 '보검 매직컬'은 배우 박보검, 이상이, 곽동연이 전북 무주의 시골 마을에서 머리와 마음을 함께 다듬어주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과정을 담아낸 힐링 프로그램이다. <tvN 제공>
◆도파민보다 '디톡스'…힐링·진솔한 이야기 주목
tvN은 리얼리티 예능 '보검 매직컬' 시즌2 제작을 확정했다고 지난 6일 밝혔다. 지난 1월 첫 방송을 시작해 이달 3일 호평 속에 종영했다. 프로그램은 배우 박보검, 이상이, 곽동연이 전북 무주의 시골 마을에서 머리와 마음을 함께 다듬어주는 미용실을 운영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주민들과 마음을 나누고 이웃이 되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 우리가 잊고 지냈던 '정'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쿠팡플레이의 예능 '강호동네서점'. 개그맨 강호동이 책방지기로 나서 매주 다양한 게스트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쿠팡플레이 제공>
OTT도 순한 맛 콘텐츠에 주목하고 있다. 쿠팡플레이는 그동안 보였던 강한 색깔에서 벗어나 순한 맛 예능을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강호동네서점'은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동네 '강호동'이라는 공간적 설정에 수천 년 동안 인간들과 함께 살아온 '호크라테스'라는 세계관이 더해진 토크쇼다. 개그맨 강호동이 책방 사장 '호크라테스'로 변신해 매주 다양한 게스트들과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책을 매개로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가 호응을 얻고 있다.
서바이벌 예능, 범죄·스릴러의 장르물, 사회 실험 영상 등 얼마 전까지 '도파민'을 내세운 콘텐츠가 쏟아지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다른 풍경이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특히 OTT에서 범죄, 폭력, 음모 등을 주제로 한 장르물이 주를 이루고, 비정상적 캐릭터나 상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며 "SNS와 쇼트폼 중심의 자극적 콘텐츠에 대한 피로감도 누적되면서 이를 디톡스하기 위해 순한 맛 콘텐츠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tvN의 예능 '보검 매직컬'은 박보검 등 미용사로 변신한 배우들이 미용실을 운영하면서 주민들과 이웃이 되는 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다.
◆나를 돌보는 '감정 관리' 중요…영화도 기분에 따라 선택
순한 맛 콘텐츠의 유행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순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방씨는 "밖에서 종일 긴장하며 지내다 보니 집에 와서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할 만한 걸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요즘 직장인 커뮤니티에도 '감정을 드러내면 하수'라는 내용의 게시물이 자주 등장한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쿨함을 유지해야 고수 취급을 받는다는 의미다. 이에 부정적 기분이 발생하는 상황을 되도록 피하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순한 맛 콘텐츠는 갈등 자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을 핵심 시청자로 겨냥한다. '보검 매직컬'의 손수정 PD 역시 "뭐든지 인터넷으로 예약하고, 나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젊은 세대들이 보면서 대리로 따뜻함을 느끼길 바랐다"며 "누군가를 대할 때와 만남을 지속할 때의 '온기', 이 진심이 닿기를 원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넷플릭스의 기분 맞춤형 콘텐츠 기능. 기분에 따른 콘텐츠를 추천받을 수 있다. <넷플릭스 캡처>
소비자들이 '감정'을 이제 관리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 속에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감정을 파악하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다. 올해 트렌드를 전망한 책 '트렌드 코리아 2026'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책은 올해 10대 소비 트렌드 중 하나로 기분 경제, 즉 '필코노미(Feelconomy)'를 제시했다. 소비자가 자신의 기분을 진단하고 관리하며, 더 긍정적인 상태로 전환하기 위해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는 경제 현상을 말한다. 책은 "기분이 소비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제 기업의 핵심 경쟁력은 소비자의 기분을 '더 행복하게, 더 차분하게, 더 신나게' 만드는 능력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영화도 '기분'에 따라 검색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무엇을 볼까'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지금 내 기분에 적합한 영화는 무엇일까'를 먼저 고려하게 된 것이다. 넷플릭스는 지난해 4월부터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기분 맞춤형 콘텐츠 검색 기능을 시험하고 있다. 장르나 배우명으로 영화를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할 때 볼 영화' '기분 전환용 코미디' 등 기분 키워드로 콘텐츠를 찾을 수 있는 방식이다.
웹툰 '마루는 강쥐' 애니메이션 포스터. 최근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왔다. <라프텔 제공>
◆'무해한' 웹툰·캐릭터도 인기…선의 서사에 매료
이처럼 기분 관리의 수단으로 자극 없는 평온함을 찾는 소비자들이 늘면서 콘텐츠를 이야기할 때 '무해(無害)하다'는 표현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원래는 식품을 두고 주로 쓰이는 말이지만, 최근 들어서는 다양한 단어에 붙는 용어가 됐다. SNS에 '무해한'이란 키워드를 검색하면 무해한 예능, 무해한 드라마, 무해한 조합, 무해한 인물 등 폭넓은 주제로 게시물이 나온다.
일본 만화 '먼작귀'는 한국에서도 뜨거운 사랑을 받아 최근 프로야구팀 LG트윈스와 협업해 굿즈를 선보였다. <티빙 제공>
소비자들이 무해한 것을 계속 찾자 영상뿐만 아니라 웹툰, 캐릭터 등의 콘텐츠에도 관심이 모인다. 대표적으로 웹툰 '마루는 강쥐'는 강아지 '마루'가 사람이 되어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힐링 웹툰이다. 누적 조회수 2억7천만회 이상을 기록하고 캐릭터 IP(지식재산권)를 넓혀가고 있다. 일본 만화 '먼작귀'(뭔가 작고 귀여운 녀석·치이카와)는 귀여운 외형을 지닌 작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특유의 순수함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랑을 받고 있다.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대구·부산·서울 등 국내에 팝업 스토어가 열리기도 했다. 지난달엔 프로야구팀 LG트윈스와 손잡고 유니폼·인형·가방·휴대폰 케이스 등 굿즈를 출시했다.
김헌식 평론가는 "자극적인 콘텐츠로 인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다보니, 오히려 선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건전한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다"며 "'순한 맛' '무해한' 콘텐츠가 주목받는 건 정상성에 대한 열망으로도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