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정 쿤스트하우스 대표
독일 델멘호스트 아동청소년정신병원에서 예술치료 임상실습을 하던 시절이었다. 병동 안 작은 미술실, 그날은 여덟 살 여자아이였다. 아이는 늘 밝았다. 미술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먼저 웃었고, 웃음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처음엔 그 웃음이 그냥 아이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도 아이는 웃으며 붓을 들었다. 그리고 집을 그렸다. 하늘색 배경에 구름 몇 개, 그리고 집 한 채. 그런데 그 집이 땅 위에 없었다. 아무것도 닿지 않은 채,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이유는 상담기록에서 찾았다. 부모의 반복되는 갈등, 예측할 수 없는 일상. 그 아이에게 집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그제야 알았다. 그 환한 웃음이 아이다운 천진함이 아니라, 아이가 버티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말로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그림은 정확했다. 뿌리도 기반도 없이, 집은 하늘에 떠 있었다.
당시 슈퍼바이저가 한 말이 오래 남았다. "아이가 힘들수록 그림은 더 솔직해집니다. 평온한 아이는 세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지만, 마음에 무언가를 품은 아이는 보이지 않는 것까지 그리거든요." 틀린 그림이 없다는 말이 그제야 실감났다.
귀국하고 몇 해가 지난 봄날, 일곱 살 아이가 그림을 내밀었다. 나무였다. 줄기는 기울고, 가지는 제각각이고, 색은 뒤섞였다. 솔직히 너무 어수선한 못 그린 그림이었다.
"선생님, 이거 바람이에요."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 부끄러웠다. 또 그랬구나. 그림을 읽지 않고 보기만 했구나. 기울어진 줄기는 바람의 방향이었고, 뒤섞인 색은 그 아이가 온몸으로 느낀 봄바람의 온도였다. 잘 그리는 법을 배웠더라면, 이 그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들은 느낀 것을 그린다. 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손이 먼저 간다. 밝게 웃는 아이가 하늘에 집을 띄우고, 말 없는 아이가 나무에 바람을 담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아이의 그림에서 보고 싶은 것만 봐왔는지 모른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저 웃음 뒤에, 저 그림 안에, 아이는 지금 내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는가.
그 여덟 살 아이가 지금쯤 어딘가에서 땅에 뿌리 내린 집을 그리고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때도, 환하게 웃고 있기를. 이번엔 버티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안전한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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