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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공간이 빚어낸 나의 얼굴

2026-05-06 06:00
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

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

나는 건축가로서 수많은 공간을 설계해왔지만, 정작 나를 가장 깊이 빚어낸 것은 내가 머무는 공간들이었다. 사무실은 책임을 마주하는 얼굴을, 강의실은 젊은 세대와 지식을 나누는 얼굴을, 집은 사춘기 세 아들의 엄마로서 인내를 배우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역할과 태도를 드러내는 무대였다.


그 무대 위에서 나는 늘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때로는 한계에 부딪힌다. 도면 위에서는 분명했던 해답이 현장에서는 여러 제약에 가로막히고, 강의실에서는 애써 준비한 말보다 학생들의 무심한 눈빛이 더 크게 다가온다. 집으로 돌아오면 괜히 예민해진 아이들의 방문이 닫혀 있고, 그 앞에서 나는 괜히 서성이다가 돌아선다. 그럴 때마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시험 앞에서, 나는 그저 조용히 버티는 법을 배운다.


건축은 벽과 지붕을 세우는 기술을 넘어 삶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다. 오래된 건물을 리모델링할 때마다 벽지 아래 남은 흔적과 바랜 창틀, 수없이 손이 닿았을 문손잡이를 마주한다. 그 자리에 스며 있는 시간과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낡은 것을 모두 없애기보다 그 위에 새로운 숨결을 얹는 과정은, 좌절과 기다림을 반복하며 조금씩 단단해진 나의 삶과도 닮아 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 다른 얼굴로 살아간다. 공간은 때로 우리에게 새로운 얼굴을 요구하고, 우리는 그 얼굴들을 조율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낸다. 어떤 날은 잘해냈다는 안도감이, 어떤 날은 벅참과 피로가 함께 쌓인다.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 결국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간다.


이 모든 얼굴을 지탱하는 힘은 결국 '쉼의 공간'에서 나온다.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를 수 있는 자리,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받아주는 공간이 있어야 우리는 다시 각자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다. 하루 종일 여러 얼굴로 버텨낸 뒤, 비로소 한 얼굴로 내려앉을 곳이 필요하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 소파일 수도 있고, 창가에 잠시 기대 서 있는 몇 분의 고요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잘해야 한다는 마음도, 설명해야 할 말도 내려놓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안식처라는 점이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공간을 설계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공간은 어떤 얼굴을 빚어낼까?"


건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고, 사람은 공간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이 질문을 독자들에게도 건네고 싶다. 당신의 얼굴을 빚어내는 공간은 어디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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