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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현의 사진 귀 기울이기] 벽으로 가는 길

2026-05-15 06:00
2024년 2월 미국 아리조나주 쪽에서 찍은 미국-멕시코 국경. 밤에 장벽을 넘어온 이민자들이 미국 국경수비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2024년 2월 미국 아리조나주 쪽에서 찍은 미국-멕시코 국경. 밤에 장벽을 넘어온 이민자들이 미국 국경수비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오는 5월20일은 2007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세계인의 날'이다. 대한민국 국민과 재한외국인이 서로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인 만큼, 다양한 축제와 행사들이 풍성하다. 지금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휴대전화나 컴퓨터만 있으면 전 세계의 실시간 정세는 물론, 지구 반대편에 사는 그 누구와 친구를 맺는 일도 극히 자연스럽다. 이처럼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경험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공존의 풍경들. 우리는 그런 시간을 보내며 '세계'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세계'가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 오십이 되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리라 마음먹은 사람. 그는 사진가 양희석이다. 그에게 처음 '벽'의 이미지가 다가온 것은 노동자 집회를 취재할 때다. 구호를 적은 골판지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이 마치 벽을 쌓아둔 것 같았다. 학보사 사진기자, 프리랜서로 사진기자, 그리고 인권위 활동을 해온 양희석에게 분단과 이념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풍경은 늘 '벽'이라는 질문을 남겼다. 그러던 2022년 그의 생일날,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보라는 아내와 가족들의 독려에 힘을 얻어 양희석은 멕시코로 향한다. 미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불법 이민자란 낙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고, 세상을 나누며, 서로의 삶에 선을 긋는 경계. 그렇게 시리즈 '벽으로 가는 길'이 시작됐다.


2024년 12월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코아츠코알코스에서 화물열차를 올라타 밤을 새운 이민자들이 기차 위에서 아침을 맞은 모습.

2024년 12월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코아츠코알코스에서 화물열차를 올라타 밤을 새운 이민자들이 기차 위에서 아침을 맞은 모습.

사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멕시코 국경은 지금보다 많이 느슨했다. 노동 이동, 계절 이동이 많았기에 지금처럼 긴 철제 장벽이 아닌 간단한 펜스와 검문소 정도만 존재했다. 하지만 2006년 이후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거대한 철제 국경 장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벽이 높아지고 강해질수록 이동하는 이들의 수가 적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장벽은 이동을 멈추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 길을 더욱 위험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작동했다. 2023년 12월부터 약 6개월, 그리고 2024년 말 다시 3개월. 양희석은 중남미 이민자들과 함께 미국 국경을 향하는 길 위에 머물렀다.


2024년 12월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코아츠코알코스에서 갑자기 도착한 화물열차에 올라타는 이민자들의 모습.

2024년 12월 멕시코 베라크루스주 코아츠코알코스에서 갑자기 도착한 화물열차에 올라타는 이민자들의 모습.

이민자들 중 다수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베네주엘라 같은 중남미 출신이다. 거기에 전쟁을 피해 고향을 등진 팔레스타인 사람들, 지중해를 건너는 아프리카 이민자들, 그리고 아시아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미국 정부는 2023년부터 1년동안 약 210만 건의 이민자 단속이 이루어졌다고 발표했고, 멕시코에서는 2024년 약 92만명의 이민자들을 구금하거나 보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문을 피해 멕시코 북부로 향하거나 국경 근처에 머무는 이들까지 합한다면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한가지, 왜 미국일까. 사실 그들에게 미국은 완벽한 낙원이라기보다 그들의 고향보다 조금은 더 살만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테말라 국경과 가까운 멕시코 남부 도시 타파출라. 멕시코 북부 미국 국경까지 가려는 이민자들은 이곳에서 멕시코 체류 허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증명서를 받기까지 길게는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허가를 기다리는 대신 북쪽을 향해 출발한다. 소수로 움직이면 경찰의 단속과 범죄에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의 방패막이 되어주며 수백, 수천 명이 함께 이동한다. 그들이 '이민자 카라반(Migrant Caravan)'이라 불리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멕시코에서 체류 허가서가 없는 이민자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카라반의 이동을 놓친 어느 새벽, 양희석 역시 텅 빈 도로 위를 홀로 걷다 버스에 오르려 했다. 하지만 버스 운전 기사에게 거칠게 쫓겨났다. 그에겐 대한민국 여권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2024년 12월. 화물열차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래 공간은 아이들이 있는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2024년 12월. 화물열차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한 아래 공간은 아이들이 있는 가족을 위한 공간이다.

사실 불법 이민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사막도 정글도 아닌 불법 조직인 카르텔이다. 이들은 돈을 받고 이민자들의 이동을 돕거나 국경을 넘는 경로를 거래한다. 이들이 개입하는 순간, 이주의 여정은 더욱 위험해진다. 그들은 이동 과정에서 납치와 몸값 지불을 요구하거나 성폭력과 매춘 조직으로의 인신매매, 갈취, 대규모 살해, 강도 등 다양한 위협을 가한다. 때로는 이민자들이 마약 조직의 운반책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이민자를 제외한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북쪽을 향해 하염없이 걷거나, 멕시코 북부로 향하는 화물열차 위에 몰래 몸을 싣는 것 뿐이다.


사진 속 이민자들이 오르는 기차는 사람이 타는 여객용이 아니라 화물열차다. 이 열차는 그들이 멕시코 북부로 향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동수단이다. 화물열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잠시 멈춰서는 철길 주변에는 매일같이 이민자들이 모여든다. 정해진 출발 시간이 없는 데다 북으로 향하는 '4000번대 열차'는 보통 2~3일에 한 번꼴로 정차한다. 작가 역시 일주일 동안 세 번의 기회를 놓친 끝에 화물열차 지붕 위에 안착했다. 지붕 위에 몸을 실은 이민자들은 열차가 잠시 멈출 때면 철길 아래로 내려가 돌을 줍는다. 어디에서 나타날지 모르는 강도들에 대적하기 위해서다. 더욱 위험한 것은 많은 이들이 미끄러운 지붕 위에서 추락해 사지가 부러지거나 바퀴 아래로 빨려 들어가 목숨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차의 이름은 라 베스티아(La Bestia), 야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2025년 1월 말. 하루의 행진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마지막 카라반이 멕시코 산토 도밍코 사나테펙에 도착해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2025년 1월 말. 하루의 행진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 시대의 마지막 카라반이 멕시코 산토 도밍코 사나테펙에 도착해 저녁준비를 하고 있다.

험난한 여정 끝에 현실의 벽을 가까스로 견뎌낸 이들은 미국과 맞닿은 멕시코 국경 도시에 도착한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벽이 시작되는 곳이다. 바다 한가운데서부터 견고한 철제 장벽이 이어지는 이곳은 누군가에게는 관광명소이지만, 불법 이민자들에게는 또 다른 기다림이 시작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국경을 넘는다 해도 곧바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내부의 가까운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사막을 가로질러야 하고, 그 여정에는 사흘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물과 음식 없이 이어지는 사막 횡단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한 여정이다. 그래서 많은 이민자들은 사진처럼 국경 근처에 머물며 미국 국경수비대에 먼저 발견되기를 기다린다. 적어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이름 없는 죽음을 맞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2025년 2월 북쪽 국경을 향해 오하카주를 통과중인 이민자 카라반. 새벽부터 길을 나선 사람들은 동이 틀 무렵, 잠시 몸을 쉬어갈 곳을 찾아 다시 걸음을 이어간다.

2025년 2월 북쪽 국경을 향해 오하카주를 통과중인 이민자 카라반. 새벽부터 길을 나선 사람들은 동이 틀 무렵, 잠시 몸을 쉬어갈 곳을 찾아 다시 걸음을 이어간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오늘, 우리 지구촌에는 여전히 언어와 피부색, 종교와 이념의 차이가 '우리'와 '그들'을 나누고, 그 잣대에 맞지 않는 벽 너머의 존재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낸다. '벽으로 가는 길'은 그저 장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벽 앞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한때 스스로 사진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 그러나 누구보다 치열한 삶의 현장 속으로 들어간 사진가 양희석, 그 길 위에서 결국 자신보다 더 절박한 삶을 견디는 사람들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시간을 따라가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끝내 잃지 않는 고귀함을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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