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그림과 제자의 그림
아이들이 해설사의 설명에 숨을 죽인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한 곳을 향한다. 어둠침침한 조명 아래 뭔가가 펼쳐져 있다. 스승이 제자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다. 사람들은 자석에 끌리듯 하나둘 모여들었다. 대구간송미술관이 마련한 '추사의 그림 수업'(2026년 4월7일~7월5일)에 오월보다 푸른 진경이 펼쳐졌다.
김정희, '불이선란도', 종이에 먹, 55.0×30.6㎝,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스승 추사 김정희의 '불이선란'과 비하인드 스토리
엄마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의 표정이 들떠 있다. 미술관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추사의 시선'으로 어린이들이 예술 경험을 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했다. 나도 덩달아 가슴이 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그의 제자들의 작품을 마주한다.
추사체(秋史體)를 창안한 김정희는 진경산수화시대를 끝으로 남종문인화시대를 열었다. 시와 그림, 글씨에 다재다능하고, 학문과 금석학(金石學), 불교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다. 그의 수하에 예술가와 정치인이 모여들었고, 그림으로는 추사파를 형성하였다. '세한도'를 비롯하여 '고사소요(高士逍遙)',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같은 그림과 글씨를 남겼고, 제자들의 작품을 평가한 '예림갑을록(藝林甲乙綠)'이 전한다.
김정희는 난초를 많이 그렸는데, 절제된 필력과 사의적인 느낌이 글씨와 어우러져 격식을 갖추었다. 특히 '불이선란도'는 자신의 인품을 녹여낸 걸작이라 할 만하다. 만년에 그의 시동 달준(達俊)에게 장난치듯 그려준 난초다. 학예를 전수받던 제자에게 무심하게 그려주었지만 다시는 그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글을 붙였다. 호방하게 난을 친 후, 왼쪽 하단에 "처음으로 달준을 위해서 붓을 휘둘렀으니 다만 하나만 있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락노인"이라고 썼다.
김정희가 시간이 지나서 다시 보니, 하늘의 이치에 닿았다는 느낌이 들어서 왼쪽 상단에 "난 꽃 안 그린 지 이십 년인데, 우연히 성품 속 하늘 이치 쳐내었구나. 문 닫고 찾고 찾고 또 찾던 곳, 이는 유마의 불이선(不二禪)이었네"라고 첨언했다. 담묵으로 은은하게 그린 난잎을 중심으로 꽃 한 송이가 초연하게 피었다. 담묵으로 그린 난초와 진한 먹글씨가 대비를 이루며, 유마불이선(維摩不二禪)에 이른다.
이 작품을 본 제자 소산(小山) 오규일(吳圭一)이 탐을 내자, 추사는 이 광경을 제사(題辭)에 보태놓았다. 왼쪽 아래 달준에게 쓴 제사 옆에 "오소산(吳小山)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려 하니 우습구나." 그러나 오소산이 포기하지 않고 재차 난을 쳐달라고 스승에게 졸라대니, 오른쪽 위에 김정희가 제사를 다시 달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실 삼아 강요한다면 또 마땅히 유마거사가 비야리성의 무언(無言)으로 사양하겠다. 만향(曼香)"이라고 못을 박았다. 마지막으로 오른쪽 중간 공간에 중심을 잡듯 "초서와 예서 및 기자법(奇字法)으로 했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그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漚竟)이 또 쓰다"라고 마침표를 찍는다.
조희룡, '홍백매도', 종이에 엷은 색, 123.0×380.0㎝, 일민미술관 소장
◆매화에 미친 제자 조희룡의 '홍백매도'
'불이선란도'는 스승과 제자가 오순도순 주고받은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김정희의 제자 중 맏이 격인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스승의 학문과 예술을 계승하며 동문 후배들을 지도하는 핵심 인물이다. 그의 매화 사랑은 스승의 영향으로 자호(自號)를 매화두타(梅花頭陀)라 할 만큼 매화벽(梅花癖)이 유별났다. 매화를 찬양하여 집 주위에 매화를 심고, 매화차를 마시며 매화가 그려진 병풍 아래 잠을 잤다.
매화 사랑은 김정희가 1823년 38세 때 청나라 오숭량이 추사 동생에게 전별시로 써준 시첩 '구리매화촌사시(九里梅花村舍詩)'를 본 것이 발단이었다. 오숭량을 기리고자 시의 첫 구절을 인용하여 삼십만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매화서옥(梅花書屋)을 지었다. 30년이 지난 68세경 '삼십만매수하실(三十萬槑樹下室)'이라 쓴 편액을 달았다. 추사의 매화사랑이 극진하자 제자들이 각자의 개성을 담은 '매화서옥'을 그렸다. 조희룡 역시 '매화서옥도'가 있으며, 매화를 가장 많이 그린 제자였다.
조희룡의 '홍백매도(紅白梅圖)'는 8폭 병풍에 매화를 가득 피운 웅장한 대작이다. 전라도 임자도에 유배된 1851년경, 친구 나기(羅岐)의 요청으로 그렸다. 매화에 진심인 마음을 거침없이 펼쳤다. 세월이 벼린 날카로운 필법과 분방한 필치가 시원시원하다. 중앙에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매화나무가 사방으로 뻗어 올랐다. 회오리 같은 가지가 공간을 장식하여 매화 바다를 이룬다. 거칠고 빠르게 긋고 붓을 옆으로 뉘어 문지른 바위의 자태가 신비하다. 흰 꽃과 붉은 꽃이 점점이 피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돋운다.
오른쪽 공간에 가지런히 쓴 화제가 그림의 깊이를 더한다. "원차산(元次山, 723~772) 선생이 비석을 갈고 글자를 새겨 중국의 영남지방인 천남(天南)의 명승을 표지하니, 산신과 수신이 모두 그의 지시를 따르게 되었으니 참으로 천고의 특별한 공적이다. 지금 내가 바다 돌의 우묵한 곳에 먹을 갈고 시골 노인의 3전짜리 개털로 만든 낡은 큰 붓을 빌려 마음대로 붓을 휘둘러 마침내 붉고 흰 1장 6척 크기의 매화를 크게 그려내었다." 그림과 글씨가 어우러진 조희룡의 작품세계는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밴 추상화의 시대를 예고한다.
유숙, '조산루상월도'(부분), 종이에 엷은 색, 52.5×185.2㎝, 간송미술관 소장
◆또 다른 제자 유숙의 '조산루상월도'
김정희가 8년간의 제주 유배에서 풀려난다. 1849년 어느 날, 8명의 제자가 모였다. 스승 앞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린 산수화를 그린다. 스승은 제자들의 작품을 보고 예술의 높고 낮음을 품평했다.
8명의 제자 중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은 풍속화의 맥을 이은 도화서의 화원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김정희의 문하에 들어가 문인화를 전수한다. 남종화법으로 담박한 농담을 살린 회화세계를 구축한다.
'조산루상월도(艁山樓觴月圖)'는 '조산루에서 달과 마시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조산루는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려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의 옛 거처이다. 이상적이 세상을 하직하고 5년이 지나서 아들 이용림(李用霖)이 아버지와 교유한 7명의 인사를 초대하여 시를 짓고 그림을 감상하며 술을 마신다. 유숙은 이날의 모임을 그림으로 기록했다.
인물의 차림새가 중국풍인 것으로 보아 중국에서 유행한 '죽림칠현도(竹林七賢圖)'의 형식을 취한 것 같다. 오른쪽 언덕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괴석 사이로 소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준다. 그 아래 시동이 차를 끓이고 있다. 한 선비가 뒷짐을 지고 숲을 바라본다. 찻상 주위에는 세 사람이 앉아 담소를 나눈다. 시동이 술병을 들고 술잔을 살핀다. 또 한 명은 앉아서 술잔을 들고 달을 감상한다. 그 앞에 그림을 감상하는 선비가 있다. 제일 앞에 두 사람은 책을 보고 있다. 그림을 그린 후, 유숙은 모임에 참석한 인물과 소감을 적고 제목 앞에 '매화서옥' 인장을 찍었다.
장승업, '삼인문년', 비단에 채색, 152.0×69.0㎝, 간송미술관 소장
◆그의 제자 장승업과 제자의 제자 인중식
유숙의 화풍은 조선시대 말기에서 근대를 이끌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에게 계승된다. 미술관에서 또 하나의 깜짝 선물인 장승업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단독으로 조명되는 전시실에 장승업의 '삼인문년(三人問年)'이 감상자들을 기다린다. 뭉게구름을 헤치고 들어가면 무릉도원에서 세 노인이 손짓한다. 송대 문인 소식의 책 동파지림(東坡志林)에 나오는 '삼로문년(三老問年)'을 해석한 그림이다. 세 명의 노인이 자신의 나이를 자랑하면서 세상을 크고 길게 보면 무량한데, 그 속에서 자잘한 일로 서로 다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알리는 내용이다.
기괴한 바위 사이로 큰 물결이 굽이쳐 내려온다. 불로장생의 얼굴 표정을 짓는 신선들이 저마다 세월의 크기를 설명한다. 그 앞에 신선들의 이야기를 훔쳐듣는 소년이 불로장생의 약초를 구하듯 쪼그리고 앉았다. 그림의 왼쪽 위에는 18년이 지난 1914년, 제자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제발을 썼다. "장오원 선생이 중년에 그린 것이다. 인물과 나무 바위의 필법과 신운이 생동한다고 할 만하다."(후략) 스승은 또 제자를 낳고 제자는 누군가의 스승이 된다.
◆그림으로 보답하는 '스승의 은혜'
스승과 제자의 그림을 감상하고 햇빛을 쏘며 바람을 맞는다. 어깨가 들썩인다. 명작이 준 기쁨이다. 나무 그늘마다 가족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서 사진을 찍고 음식을 먹는다. 미술관에서 맞는 진풍경이다. 그 옛날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작품으로 보답했다면, 스승의 은혜를 그림으로 가르치는 부모가 있어 세상은 더 빛난다. 스승의 날에 카네이션 한 송이를 세상의 모든 스승에게 바친다.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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