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 영화평론가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누적 판매 40만 부를 돌파한 한국 SF 문학계의 기념비적인 베스트셀러다. 생화학 전공자인 김 작가는 정교한 과학적 사유 속에 기술의 이기(利器)로부터 소외된 약자들을 조명하고, 기억이나 감정처럼 사라져가는 가치를 복원해낸다. 광활한 우주에서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그의 이야기는 이성과 감성이 잘 융합되어 있어 일찍부터 영화계의 러브콜을 받아왔다.
지난 3일 개봉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이하 '순례자들')는 김초엽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첫 영상물이다. '스펙트럼', '지구 끝의 온실' 등 그의 다른 단편들도 영상화 소식이 전해져 있는 가운데, 한국 SF 장르의 저변을 넓혀줄 작품이자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재로써 '순례자들'의 개봉이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수 있다.
'소피'(성우 김향기)는 나쁜 감정들은 모두 거세된 지구 외부의 유토피아, '마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마을에는 독특한 관습이 있는데, 성년(18세)이 되면 인류의 고향인 지구(시초지)로 1년간 순례를 보내는 것이다. 어느 날, 소피는 의문의 목걸이 메신저를 통해 '데이지'(성우 박지후)의 연락을 받는다. 데이지는 자신이 원래 소피의 절친이었으며, 시초지에서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찾으러 시초지에 왔다고 말한다. 소피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원로들이 돌아오지 않는 순례자들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도록 주민들의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피는 처음에 반신반의 하지만, 곧 데이지의 말이 사실임을 하나씩 확인해 나간다.
데이지가 본 지구는 혐오와 폭력이 존재하는 미개한 디스토피아다. 유전자 조작으로 개조된 흠 없는 인류는 그렇지 못한 인간들을 차별하고 자기들만의 구역을 정해놓는다. 유전자 개조 기술은 20세기 우생학의 망령을 부활시킨 것이다. 데이지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에게 결점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순례자 '올리브'(성우 이주영)와 일행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에 남겠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슬픔과 함께 연민이 있고, 고통을 극복하게 해줄 사랑이 존재한다는 이유다. 소피도 데이지와의 교신을 통해 마을의 평온함은 인간의 감정과 본성을 인위적으로 배제하고 주체성을 동결한 데서 오는 진공 상태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결국 '순례자들'은 제목을 변주시킨 질문에 수렴한다. '당신이 순례자라면,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원작에서는 데이지가 지구로 떠난 후 남긴 독백형 편지와 액자식 구성으로 서사가 전개되는 반면, 허평강 감독은 소피가 데이지와 통신하며 마을의 비밀을 파헤치게 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서스펜스와 반전의 효과를 높였다. 유토피아와 지구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대비시킨 미장센, 몽환적인 사운드, 트렌디한 음악 또한 원작 특유의 서정적 톤 앤 매너를 시청각적으로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다만, 유전공학적 디스토피아라는 철학적 세계관을 깊이 있게 다루기에 60분 분량의 전체관람가 애니메이션이라는 그릇은 다소 작게 느껴진다. 웹툰, 웹소설을 넘어 우리의 뛰어난 SF 문학도 곧 2차 창작물을 통해 더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게 되기를 기대한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