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배 지휘자
우리에게 건축물이란 살아가는 공간이기에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가끔 시선을 사로잡는 예술적인 건물을 만난다. 대개는 겉모습만 보고 스쳐 지나가지만 어떤 건축물은 내부에 들어가 건축가의 생각을 오롯이 마주하게 한다. 마치 베토벤의 작품 한 곡을 탐미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공간에서 삶과 예술에 대한 본질적인 사유를 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유럽에서 마주한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공간들이 그러했다. 겨울에 찾은 알프스의 '테르메 발스'는 돌과 물, 빛으로 지은 석굴 성전이었다. 회색 규암 수만 장을 켜켜이 쌓아 올린 공간은 비움과 사람을 위한 건축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온천탕에 앉아 있으면 돌 지붕의 미세한 틈새를 뚫고 나오는 빛줄기들이 음악의 리드미컬한 쉼표처럼 다가온다. 고요한 공간 속에서 춤토르는 물의 온도 변화와 공간의 어쿠스틱 잔향을 마치 감각을 위한 교향곡처럼 정교하게 조율해 냈다. 쾰른에 들를 때마다 찾는 콜룸바 뮤지엄 역시 같은 메시지다. 폭격으로 무너진 성당 폐허 위 그곳은 "새로운 건축은 역사적 상흔과 함께 숨쉬어야 한다"는 철학이 담긴 공간이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여백 속, 벽돌 틈새로 나오는 빛과 고요 속에서 시민들은 저마다의 아날로그적 삶을 회복하고 있었다.
춤토르의 건축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의 문화적 풍경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화려한 건축물과 압도적인 규모의 문화예술 공간을 마주한다. 시선을 사로잡는 세련된 외형은 도시의 활력이 되기도 하지만, 본질은 외형적 그릇보다 그 안에서 살아 숨쉴 인간의 문화적 생태계를 가꾸는 일이다. 유럽의 예술 조직들을 경험하며 내가 목격한 문화적 뿌리가 깊은 나라들의 특징은 명확했다. 그곳의 시민들은 삶의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극장이나 미술관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예술 그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예술만이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만들어준다는 믿음이 마음 속에 깊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 어떤 작품을 올리든, 예술공간의 목적은 향유하고 위로받는 이들의 일상을 향해야 한다. 그곳을 찾아와 줄 사람들의 일상적인 발길과 애정이 없다면, 아무리 멋진 건물이라 한들 차가운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하다. 공간의 감동이 일회성 구경거리에 그치지 않으려면, 관객과 예술가가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쌓아가는 선순환이 일어나야 한다. 건축의 아름다운 외형과 그 안을 채우는 인간의 호흡이 나란히 걸어갈 때, 비로소 공간은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 알고리즘과 가상이 지배하는 AI시대, 우리가 문화공간을 찾는 이유는 명확하다. 유한한 한계를 지닌 인간들이 무대 위에서 단 하나의 대사, 단 한 번의 몸짓, 단 하나의 음표를 책임지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드라마를 직접 목격하고 함께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는 순간 무대와 객석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그리고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공간 안으로 번지는 따뜻한 온기는 결코 복제할 수 없다. 오직 그 시간, 그 장소에 있는 사람들만 나눌 수 있는 살아있는 공기야말로 기계가 흉내낼 수 없는 가장 인간다운 아름다움이다. 결국 문화적 공간의 가치는 세련된 외벽이 아니라 그 공간이 품어낼 인간들의 관계 속에서 완성된다. 추천 피드에 갇혀 파편화되던 외로운 개인들이 한 공간에 모여 타인의 숨소리를 공유하고, 저마다의 이야기를 무대를 통해 감각하며 함께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아날로그적인 연결이야말로 예술 공간이 존재해야 하는 진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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