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은 CFA건축사사무소 대표
요즘은 자연스레 월드컵 중계에 눈길이 간다. 월드컵 경기를 보다 보면 내가 기다리는 장면이 하나 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의 환호가 잦아들면, 중계 카메라는 천천히 줌 아웃하며 경기장을 벗어난다. 관중석 위로 올라가고, 지붕을 넘어 도시의 전경을 비춘다. 불과 몇 초 남짓한 장면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짧은 시간을 유난히 오래 바라보게 된다.
그 몇 초는 도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어떤 도시는 바다를 품고 있고, 어떤 도시는 강을 따라 빛이 이어진다. 오래된 건물과 현대적인 스카이라인이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도시도 있고, 산을 배경으로 경기장이 자리한 곳도 있다. 경기장은 비슷해 보여도, 그 경기장을 품고 있는 도시는 하나같이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건축을 하다 보면 건물보다 먼저 그 건물이 놓인 자리를 보게 된다. 땅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경기장을 앉힌 도시가 있는가 하면, 주변의 오래된 골목과 경기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해둔 도시도 있다. 경기가 끝난 뒤에도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경기장 자체보다 그 주변의 풍경과 도시의 분위기인 경우가 많다. 축구는 경기장 안에서 펼쳐지지만, 그 기억은 결국 도시와 함께 남는다.
이번 월드컵 개최 도시들만 보아도 그렇다. 바다와 산이 어우러진 밴쿠버, 오랜 역사 위에 거대한 도시가 켜켜이 쌓인 멕시코시티, 압도적인 스카이라인으로 도시의 에너지를 보여주는 뉴욕, 바다와 숲이 함께 어우러지는 시애틀. 이들은 같은 월드컵을 치르지만, 어느 도시도 서로를 닮지 않았다. 도시마다 품고 있는 역사와 자연환경이 다르고, 그 위에 쌓인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계 화면에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몇 초만으로도 각 도시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전해진다.
도시의 개성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건축물 몇 채를 세운다고 새로운 도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쌓인 역사와 거리의 풍경, 시장과 공원, 강과 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도시의 성격을 만든다. 건축 역시 그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입히는 존재일 뿐, 도시의 개성을 대신할 수는 없다.
이번 월드컵도 수많은 명승부를 남기겠지만, 내 기억에는 경기 결과만 남지는 않을 것 같다. 경기 종료 후 화면을 가득 채우던 도시의 풍경, 그 짧은 몇 초가 오래 마음에 머문다. 다음 경기를 볼 때도 나는 자연스레 경기장 밖으로 시선을 옮길 것이다. 어쩌면 월드컵은 경기를 위한 축제인 동시에, 도시가 자신을 세상에 소개하는 가장 큰 무대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