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논설실장
800조 투자의 숨겨진 함의
대통령 맞절 재벌 국민영웅
‘민주주의 호남에 대한 보상’
영호남의 어긋난 배분적 정의
벼를 당겨 죽게 하지는 말길
박재일 논설실장
도대체 800조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광주전남에 800조원을 들여 4기의 반도체 팹을 짓기로 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하이닉스 회장이 사돈처럼 맞절로 약속했고, '국민영웅'이라 치켜세웠다. 1980년대 대학 운동권의 반기업, 반자본주의 이념을 상기하면 엄청난 반전이다.
800조는 그 수치부터 상상하기 어렵다. 건국이래 전대미문의 투자다. 2026년 한국의 국가 총예산이 728조원이다. 국민·사학 연금 등을 뺀 집행예산은 반토막인 480조원 정도다. 여기다 공무원 인건비, 교육비, 국방비, 보건복지비를 제하면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투자액수는 별로 많지 않다. 중견기업 공장을 만드는데 1천억원이라면 800조는 무려 8천개를 만든다는 소리고, 1조짜리 초대형 공장은 800개에 해당된다. 난 대구가 생겨난 이래 1조를 들여 공장을 지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800조를 둘러싸고 이재명 대통령이 쏟아낸 발언을 들으면 깜짝 깜짝 놀란다. 이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수도권과 지방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서두를 꺼냈다. 맞는 말이다. 그 다음 대목부터 고개가 갸웃한다. "영남보다 호남이 훨씬 나쁜 상태다. 호남에 좀 더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영호남'은 정치사에서 민감도가 높은 영역인데다 머릿속에 맴돈 기초통계도 대통령의 인식과 배치된다. 지역간 형편을 조금이라도 살펴본 이들이라면 대구의 1인당 GRDP(지역내 총생산)와 경제성장률이 30여년째 최하위란 점을 안다. 영호남 대표도시 대구와 광주가 국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총생산 비중이 정반대의 길로 간 지 오래다.
호남을 더 챙기겠다는 '배분적 정의'가 논란을 빚자 청와대는 노골적 논리를 폈다. "역사적으로 누적된 투자량을 비교한다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를 지켜온 호남에 대한 보상이다"고 했다. 솔직한 인식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반문이 생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총합은 무엇이며, 그 기여도는 배분적으로 나눠질 수 있는가. 대구경북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가?
정부의 총 2천조원 3대 메가프로젝트에서 대구경북은 구미의 AI투자를 제외하면 거의 제로다. 유철균 경북연구원장은 800조에 대해 "영남이 50년 동안 받았던 예산이 갑자기 호남으로 가게 되는 결과다. 반도체 호황이 5년 간다고 가정하면 호남과 경북의 격차는 스위스와 네팔 수준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800조 반도체 투자를 놓고 부정적 전망도 있다. "업황 슈퍼사이클이 마냥 이어질 수는 없다. 미국이 반도체 독점에 제동이라도 건다면...". 덧붙여 전력·용수·인력 공급을 광주전남이 충족하기 쉽지 않을 것이란 진단도 있다. 지난 4월만 해도 최태원 회장은 국회 답변에서 "굳이 그기까지 가야하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민주주의 호남 보상 논리'에도 불구하고 800조 베팅은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의 전당대회 준비용, 절대적 지지기반인 호남 민심 잡기란 궤도를 탈출하지 못한다. 호남의 어떤 국회의원은 "반도체가 호남으로 와야 내란 종식이 된다"고도 했다.
이런 옛 말이 생각난다. '벼가 빨리 크길 바라는 마음에 위로 잡아 당기면 크지 못하고 말라 죽는다'. 행여 '삼전닉스' 머리를 자꾸 잡아 당겨 일을 거르치지 않을까 두렵다. 섭섭함이 쌓이면 차별이 된다. 호남이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고 벼의 머리를 당겨 또다른 차별을 잉태해야 할까. 이 대통령의 고향은 안동이 아닌가.
박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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