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 경북연구원장
최근 반도체,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라는 국가 대도약 프로젝트의 거대 서사가 국민보고회로 이어지고 있다. 이 거대 서사에 올라탄 지역들은 밤잠을 못 이루는 뜨거운 꿈을 꾸고 있다. 반면 투자 계획에서 소외된 지역들은 비판과 냉소를 쏟아내고 있다.
어느 쪽이나 바람직한 반응은 아니다. 이제 겨우 중앙 정부와 대기업의 첫 번째 계획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지역에 필요한 것은 유례없는 사회 변화에 대한 의연함, 낙천성, 열린 마음이다. 그리고 거대 서사의 거시적 담론에 현혹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미시적 존엄을 지키는 일이다.
국가 대도약 프로젝트의 규모는 정부 예산을 제외한 민간의 장기 투자만 4천755조 원이다. 핵심 인력 집단의 조직적 동원이라는 관점에서 이는 연봉 1억 원의 직장인 4천755만 명을 동원하는 규모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회 변화의 최상위 단계를 '혁명'이라고 생각해왔고 그 혁명의 모델은 대개 1917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 변화는 혁명보다 더 높은 단계에 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당원은 24만 명이었다. 이 24만 명은 문해력, 지적 능력, 철의 규율을 지키는 능력, 불리한 상황에서도 버틸 수 있는 심리적 강인함으로 걸러지고 걸러진 표본이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연봉 1억 원의 직장인 집단은 고등 교육 이상의 학력과 전문성, 조직 내 규율에 적응하고 성과를 내는 능력, 장기간 경쟁에서 사회적 검증을 거친 집단이라는 점에서 볼셰비키 당원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거칠게 비교하면 AI 사회를 향한 한국의 대도약은 러시아 혁명이 당시 러시아 제국의 230분의 1에 해당하는 좁은 땅에서 198번 일어나는 것과 같다.
이 비교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절대적 예측불가능성이다. 이제까지의 경영학 교과서에는 영업이익을 100조 원 이상씩 내는 기업이 어떻게 투자해야 한다는 해답이 없었다. 영업이익이 웬만한 산업 전체와 비슷하거나 더 크기 때문에 투자할 곳이 없다. 한계수익률 자체가 구조적으로 붕괴한다.
놀랍게도 지금 우리나라는 그런 기업이 둘이나 있다. 어디에도 벤치마킹할 곳이 없는 두 기업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투자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투자에서 소외되었다고, 지역이 홀대를 받았다고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내년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도체의 내년을 예측하기 어렵다. 지금의 반도체 호황은 오픈에이아이처럼 수익도 못 내면서 투자를 받아 굴러가는 AI 빅테크들이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처럼 직접 데이터센터를 짓겠다고 뛰어들면서 촉발되었다. 아직 만들지도 않은 데이터센터를 위해 아직 통장에 들어오지도 않은 돈으로 반도체를 주문하는 사재기 경쟁이 만든 수요다. 장관님은 향후 5년간의 주문이 쌓여 있다고 자랑하지만 반도체의 납품 대금을 과연 몇 회사가 제때 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데이터센터의 내년도 예측하기 어렵다. 대도약 프로젝트는 수 기가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를 천명했지만 아직 기가와트 규모의 데이터 센터는 전 세계에 한 곳도 없다. 그런 규모의 데이터센터에서는 그리드 전력선에 조그만 오류가 생겨 1천분의 1초만 전력이 끊어져도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기가와트 규모에 가장 근접한 250MW 규모의 데이터센터 콜로서스(멤피스 주 테네시)는 전력선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는 결국 데이터센터가 발전시설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원망하저(源網荷貯: 전원,전력망, 수요부하, 전력저장) 일체화를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도약 프로젝트의 계획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피지컬 AI의 내년도 예측하기 어렵다. 세계 최초로 피지컬 AI가 적용된 중국 장쑤성과 광동성 2개 성에서는 2024년 한 해에만 14만 개 공장이 문을 닫았다. 무차별 칼부림 같은 사회보복성 범죄가 이어졌고 수많은 농민공들이 자살했으며 수만 명씩 길거리에서 노숙했다. 대졸자들은 '전업자녀'가 되었고 배달 기사로 내몰린 가장은 15시간씩 도로를 달리다 과로사했다. 한국이 도대체 어떤 피지컬 AI를 해야 이렇게 살과 뼈를 깎으며 피눈물로 만든 중국 피지컬 AI를 이길 수 있는지 누구도 자신있게 말하지 못한다.
지역에 사는 우리는 "(나는) 시를 쓰는 삼엄함 속에 /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외국에서 살면서 공부하고 시를 썼습니다"라고 했던 시인 허수경을 기억한다. 허수경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92년 독일로 유학갔다. 2018년 6월 경북 안동에서 이육사 문학상을 받았고 같은 해 10월 뮌스터에서 위암으로 죽었다. 2026년 출간된 그녀의 유고 시집 맨 앞에 실린 이 문장은 이육사 문학상 수상소감이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노력. 거기에 들어간 엄청난 노력을 다 보상해줄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시인은 자기 자신과 싸우면서 혼자 시를 쓴다. 나는 이걸 쓸 수 있고 쓰고 말 것이라는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쓴다. 그래서 시를 쓰는 것은 삼엄하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그 시인 한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고 삼엄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역은 이런 시인의 마음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시인에게는 세상의 보상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목표와 가치가 있고 존엄이 있다. 어떤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시인은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시인은 자본과 제도와 대세의 바깥에서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의 주변부성을 냉정하게 자각하고 소외된 다른 사람들을 걱정할 수 있다.
미시적 존엄을 지키면서 때를 기다리자. 누가 공장에 투자한다면 우리는 사람에게 투자하자. 우리 앞에 닥친 시대는 모두가 처음 겪는 것이며 현재의 사건을 단독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의연함, 낙천성, 열린 마음으로 인재를 찾고 반도체와 데이터 센터의 추가 기획을 예의 주시하며 피지컬 AI로 인한 서민들의 고용 충격을 보살피자. 오늘의 심란함은 내일의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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