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훈 (주)비즈데이터 이사·파리1대학 법학박사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증권가의 환호와 달리, 국민들은 삶이 나아졌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6월 우리나라 수출액은 1천22억 달러로 월간 기준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이달 반도체 수출은 무려 199.5% 증가했고, 무역수지 흑자는 361억 달러에 달했다. 대한민국은 독일, 중국,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월간 수출 1천억 달러를 돌파한 국가가 됐다. 반면 올해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2천조 원으로 한 가구당 1억 원에 가까운 빚을 지고 있는 셈이며, 소비는 계속 줄고 있다. 현재 소비자들이 느끼는 현재생활형편(CSI)에 대한 평가는 기준치 100을 밑도는 '비관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 올해 5월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4만 명 감소했고, 자영업자들이 치솟는 임대료, 인건비와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하면서 골목상권의 폐업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시장이 창출한 부가 소수에게만 머물 뿐, 국민 모두에게 그 기회가 돌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정치는 국민에게 골고루 부의 기회가 돌아가는 선순환의 국가 시스템을 가동해야 한다. 즉, 일자리 창출, 중산층 복원, 소상공인 진흥, 노동시장 개혁, 교육복지, 공정한 경쟁, 지역균형발전 등의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발표한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논의는 몇 가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자유시장경제의 자율적 결정으로 기업 스스로 선택한 것인가, 둘째는 국가균형발전이 단 한 지역의 발전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삼성과 SK의 호남권 투자가 대통령과 거대 집권당의 압박에 의한 결정이라면, 이것은 국가 경제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왜곡된 선례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제1항은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엇을 생산할 것인지, 어디에 투자할 것인지, 어느 지역에 공장을 지을 것인지는 궁극적으로 기업이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균형발전은 어느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국가 전체를 바라보는 거시적 시각으로 다루어야 마땅하다.
20세기 경제학 거장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노예의 길'에서 "정부가 시장의 결정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자유는 점차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그의 통찰은 단순한 이념의 문제를 넘어 수많은 국가의 흥망이 증명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법, 유럽의 핵심원자재법 등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산업정책은 기업의 목을 쥐고 흔드는 통제가 아니라, 보조금과 인프라를 매개로 한 '전략적 유인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설령 국가가 정책적 지원을 통해 호남을 반도체산업의 새로운 거점으로 육성하더라도, 영남에도 이에 상응하는 미래 성장전략이 제시되어야만 한다. 균형발전은 어느 한 지역에 산업을 몰아주어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 생태계를 조성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정치는 기업을 대신해 공장을 지을 수 없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기업이 가장 효율적인 곳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규제를 혁신하고, 인재를 키우며,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으로 볼 때 정권이 전체 국민의 삶은 돌보지 않고 집권당의 텃밭에만 몰두한다면, 언젠가는 부메랑이 되어서 돌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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