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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3천 년의 기도를 품은 바위…고령 장기리 암각화

2026-07-17 16:32

한반도에만 있는 독창적 ‘검파형 문양’의 숨겨진 의미
대가야 이전 청동기인들의 생존과 권력을 담은 성스러운 기록

고령 장기리 암각화 입구 안내 조형물. 장기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검파형 문양을 간직한 대표적인 선사문화유산으로, 세계유산 지산동 고분군과 함께 고령 역사문화 관광의 핵심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현철 기자>

고령 장기리 암각화 입구 안내 조형물. 장기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검파형 문양을 간직한 대표적인 선사문화유산으로, 세계유산 지산동 고분군과 함께 고령 역사문화 관광의 핵심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현철 기자>

여행지에는 풍경을 감상하는 곳이 있고, 시간을 만나는 곳이 있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장기리 암각화는 후자에 속한다. 화려한 건축물도, 웅장한 성곽도 아니다. 그저 오래된 바위 한 면일 뿐이다. 그러나 그 바위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3천 년 전 사람들의 삶과 기도, 그리고 공동체의 염원을 마주하게 된다.


현재 보물 제605호인 장기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검파형 문양을 간직한 우리나라 대표 선사문화유산이다. 고령군은 이 같은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를 바탕으로 국보 승격을 추진하며 연구와 보존환경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장기리 암각화는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선사시대 암각화로 꼽힌다. 그러나 표현하는 세계는 분명히 다르다. 반구대 암각화가 고래와 사냥을 통해 수렵·채집 사회의 역동성을 보여주고, 천전리 각석이 기하학적 문양과 신라 화랑의 기록을 담고 있다면, 장기리 암각화는 농경사회로 접어든 청동기인들의 제의문화와 권위를 검파형 문양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 남부의 생업 방식과 사회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사적 기록이다.


장기리는 예부터 '알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천신과 산신이 만나 알을 낳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을이다. 생명의 탄생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 이야기는 선사인들이 왜 이곳을 신성한 공간으로 여겼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은 평범한 농촌마을이지만, 청동기시대에는 하늘과 땅, 사람이 교감하며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던 성스러운 제의 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기리 암각화는 1971년 마을 주민의 제보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울주 천전리 각석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발견된 암각화이며, 이후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와 함께 우리나라 선사문화 연구의 기준이 되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 입구 안내 조형물. 장기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검파형 문양을 간직한 대표적인 선사문화유산으로, 세계유산 지산동 고분군과 함께 고령 역사문화 관광의 핵심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현철 기자>

고령 장기리 암각화 입구 안내 조형물. 장기리 암각화는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검파형 문양을 간직한 대표적인 선사문화유산으로, 세계유산 지산동 고분군과 함께 고령 역사문화 관광의 핵심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석현철 기자>

장기리 암각화의 핵심은 검파형 문양이다. 전체 59점의 문양 가운데 38점이 이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동기시대 마제석검 손잡이나 청동검 칼집을 닮은 이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당시 지배층의 권위와 신성함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해석된다. 공동체를 수호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암반에는 검파형 문양 외에도 동심원과 성혈이 남아 있다. 동심원은 태양과 생명의 순환, 풍요를 상징하고, 작은 홈인 성혈은 별자리나 제의 행위와 관련된 흔적으로 해석된다. 각각의 문양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제의 장면을 구성하는 상징 언어처럼 읽힌다.


최근 고고학계는 장기리 암각화 주변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농경 유적을 함께 분석하며 이 일대가 단순한 제사 공간을 넘어 농경 공동체의 정치·종교적 중심지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문양은 곧 당시 사회의 권력 구조와 신앙 체계를 보여주는 시각적 기록인 셈이다.


더욱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검파형 문양이 한반도에서만 확인되는 독창적인 상징체계라는 사실이다. 중국과 일본 등 주변 지역에서는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는 장기리 암각화가 우리 선사문화가 독자적으로 형성되고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며, 학계가 '한국형 암각화의 정수'라고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암각화 앞을 흐르던 회천 역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은 하천의 모습이 달라졌지만 청동기시대에는 강물이 암각화 가까이까지 흘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었고 비는 농경사회의 생존을 좌우했다. 결국 이곳은 하늘과 물, 땅이 만나는 공간에서 풍년과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했던 신성한 제의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장기리 암각화의 가장 큰 매력은 화려함보다 '고요함'이다. 숲속에 자리한 바위 앞에서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걸음을 늦추게 된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공간에서 암각화를 바라보고 있으면 3천 년 전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가 아직도 바위 위에 남아 있는 듯한 깊은 울림을 느끼게 된다.


장기리 암각화는 학술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청동기시대 실물 유물과 동일한 형태의 문양을 통해 제작 시기를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으며, 조형성과 상징성 역시 뛰어나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고령군은 보물에서 국보로의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세계유산인 지산동 고분군이 대가야의 찬란한 문명을 보여준다면, 장기리 암각화는 그보다 훨씬 이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전하는 문화유산이다. 역사는 문자로만 기록되지 않는다. 때로는 바위에 새겨진 작은 선 하나가 한 시대 전체를 증언하기도 한다.


국보 승격은 지역사회의 오랜 숙원이기도 하다. 고령군은 2023년 지산동 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선사시대부터 대가야까지 이어지는 역사문화 관광벨트 조성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국보 승격을 위해서는 학술적 연구뿐 아니라 보존환경 개선과 주변 경관 정비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문화관광해설사 김숙화 씨가 고령 장기리 암각화 앞에서 청동기시대 검파형 문양과 동심원 문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 씨는 장기리 암각화의 국보 승격을 위해서는 보호시설 개선과 주변 환경 정비, 추가 발굴조사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현철 기자>

문화관광해설사 김숙화 씨가 고령 장기리 암각화 앞에서 청동기시대 검파형 문양과 동심원 문양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 씨는 "장기리 암각화의 국보 승격을 위해서는 보호시설 개선과 주변 환경 정비, 추가 발굴조사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석현철 기자>

수년째 장기리 암각화를 안내하고 있는 문화관광해설사 김숙화(75) 씨는 "장기리 암각화는 역사적 가치만큼은 국보로 손색이 없지만 현재의 보호시설은 설치된 지 오래돼 보존 기능과 관람환경을 함께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암각화 주변 농가와 시설물도 국가유산의 품격에 맞게 정비돼야 하고, 아직 확인되지 않은 선사 유적을 찾기 위한 추가 발굴조사도 반드시 필요하다"며 "국보 승격은 문화재 지정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 전체를 함께 보존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령군도 학술대회와 연구용역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며 국보 승격의 근거를 축적하고 있다. 검파형 문양의 독창성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한편, 노후 보호시설 개선과 3차원(3D) 정밀 스캐닝 등 과학적 보존체계 구축도 추진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제605호 고령 장기리 암각화 전경. 청동기시대 권위를 상징하는 검파형 문양과 태양·풍요를 의미하는 동심원 문양 등이 새겨져 있으며, 고령군은 현재 국보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석현철 기자>

보호각 안에 자리한 보물 제605호 고령 장기리 암각화 전경. 청동기시대 권위를 상징하는 검파형 문양과 태양·풍요를 의미하는 동심원 문양 등이 새겨져 있으며, 고령군은 현재 국보 승격을 추진하고 있다. <석현철 기자>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집중호우와 산성비, 생물학적 훼손은 노천 석조문화재의 가장 큰 위협으로 꼽힌다. 장기리 암각화 역시 표면 박리와 이끼류 번식이 우려되는 만큼 국가 차원의 예산 지원과 체계적인 보존 관리가 요구된다.


3천 년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바위에 새긴 간절한 염원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앞에 남아 있다. 그것은 풍년을 기원한 기도였을 수도, 공동체의 평안을 바란 소망이었을 수도 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는 단순한 청동기 시대 유적이 아니다. 우리 문화의 시작을 증언하는 시간의 기록이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살아 있는 역사다. 이제 그 가치를 온전히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국보 승격은 문화재 등급 하나를 높이는 일이 아니라, 우리 선사문화의 뿌리를 국가적으로 다시 확인하는 역사적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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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철

지역의 변화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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