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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바다, 경주의 동해] ① 바다에 남은 왕, 천년의 파도를 지키다

2026-07-24 06:00

무덤 대신 바다의 용이 된 왕 … 문무대왕릉에 깃든 호국의 서사

문무왕릉·감은사·이견대 걷는 여정

왕의 유언과 만파식적의 전설까지

경주 바다가 들려주는 평화의 서사

 

바다 지키기 위해서 세운 감은사와

용이 된 아버지를 봤다는 이견대 …

천년 전엔 피리로 파도를 잠재웠듯

이곳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도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해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삼국사기는 신하들이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한다. 육지에서 약 200m 떨어진 대왕암은 1천300여 년 동안 문무왕의 마지막 자리로 기억돼 왔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해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삼국사기는 신하들이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한다. 육지에서 약 200m 떨어진 대왕암은 1천300여 년 동안 문무왕의 마지막 자리로 기억돼 왔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문무왕이 짓기 시작한 감은사는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성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두 석탑과 금당·강당터 등이 통일신라 사찰의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옛 절터를 지키고 있다. 문무왕이 짓기 시작한 감은사는 아들 신문왕이 682년 완성했다. 건물은 사라졌지만 두 석탑과 금당·강당터 등이 통일신라 사찰의 공간 구성을 보여준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새벽이었다.


수조마다 어른 팔뚝만 한 물고기들이 어둠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방생고기 팝니다' 해변을 따라 늘어선 가게엔 이런 글씨를 써 붙인 수조와 작은 기도방이 잇따라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바닷가에는 동이 트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두 손을 모은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이곳은 경주시 문무대왕면 봉길리 해변.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사람들의 안부를 묻게 하는 여름이다. 천 년 전 한 왕이 바다로 돌아간 자리에 오늘도 사람들은 저마다의 염원을 펼쳐놓는다.


무엇을 놓아주고, 무엇을 빌기 위해 이곳에 오는 걸까.


경주의 바다는 새벽부터 사람들의 소원을 듣는다.


◆ 왕의 마지막 명령


"지난날 온갖 정사를 다스리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곁에 굴을 판다. 이는 재물만 헛되이 쓰고 역사책에 비난을 남기며,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을 구제하지 못한다. 조용히 생각하면 애통함이 그지없으니, 나는 이와 같은 일을 바라지 않는다. 숨을 거둔 뒤 열흘이 되면 곧 고문(庫門) 밖의 뜰에서 서국의 방식에 따라 불로 장사 지내라. 상복에는 본래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장례 제도는 힘써 검소하고 절약하도록 하라." (삼국사기 권7, 문무왕 21년조의 유조)


기도하던 이가 떠난 자리에 서서, 문무왕의 마지막 유언을 찾아 읽었다. 긴 문장을 따라가던 손가락이 한 대목에서 순간 멈췄다. 삼국통일을 이뤄낸 위대한 왕이 화려한 무덤을 남기지 말라고 했다. 죽은 사람의 권위를 세우느라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신하들은 왕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고 기록한다. 바로 봉길리 해변에서 200m 정도 떨어진 바다 가운데 자리한 문무대왕릉이다.


고개를 들자, 왕이 잠들었다는 바위 위로 흰 파도가 연달아 부서지고 있다. 봉분도, 석물도, 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그 어떤 장식도 없다. 오직 바위와 물결뿐이다. 새 몇 마리가 지친 날갯짓을 멈추고 바위 위에서 잠시 쉬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자 위대한 왕의 업적보다 한 사람으로서의 문무왕이 궁금해졌다. 경주 곳곳을 오가며 그의 이름과 흔적을 여러 번 만났지만, 정작 그가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자리를 바다에 정했는지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맏아들로 태어나 661년 왕위에 오른 뒤 백제 부흥세력을 제압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 이어 당나라 군대까지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한 왕. 한 번에 나열하기엔 숨이 가쁠 만큼 많은 일을 이루었지만, 그에게는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끝내 이루지 못한 염원이 있었다. 바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우기 시작한 절, 감은사였다.


감은사지 금당터 아래에 남아 있는 독특한 석조 유구. 받침돌과 긴 돌을 결구해 바닥 아래에 빈 공간을 둔 구조다. 삼국유사에는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아래 동쪽으로 공간을 마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감은사지 금당터 아래에 남아 있는 독특한 석조 유구. 받침돌과 긴 돌을 결구해 바닥 아래에 빈 공간을 둔 구조다. 삼국유사에는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금당 아래 동쪽으로 공간을 마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 아버지의 염원을 완성한 아들


봉길리 해변을 떠나 대종천 물길을 따라 육지로 향한다. 바다는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길은 물줄기를 거슬러 천년 전 이야기의 안쪽으로 이어진다. 차로 몇 분쯤 달리자 들판 너머로 돌탑 두 기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무왕이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짓기 시작하고 아들 신문왕이 완성한 감은사다.


감은사는 문무왕이 살아서 완성을 보지 못한 절이다. 삼국유사에는 문무왕이 이 절을 완공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682년 절을 완성하고 '감은사(感恩寺)'라 이름 지었다. 은혜에 감사하는 절. 나라를 지키려 했던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는 아들의 마음이 그 이름에 담겼다.


이제 불전과 회랑은 사라지고 빈 절터에는 동탑과 서탑만이 나란히 서 있다. 높이 13.4m. 경주에서 감포로 향해 가다 보면 도롯가에서도 볼 수 있는 탑이지만, 막상 그 앞에 서면 실제 크기는 예상보다 훨씬 크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탑은 몸 위로 육박해온다. 장대하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단단하지만 둔중하지 않다.


경주 감은사지 동탑과 서탑, 보호수.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경주 감은사지 동탑과 서탑, 보호수.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도 모르게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전국에 문화유산 답사 열풍을 일으킨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감은사 답사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라고 쓰고 싶다고 했다는데, 정말이지 설명보다 감탄이 먼저 나오는 곳이다.


두 탑 사이를 지나 금당터로 올라서면 사라진 법당의 윤곽을 어렴풋이 그려볼 수 있다. 금당 바닥 아래에는 다른 절터에서 보기 힘든 석조 공간이 남아 있다. 받침돌과 긴 돌을 결구해 바닥을 지면에서 띄운 독특한 구조다. 금당 섬돌 아래 동쪽으로 구멍을 내어 용이 된 문무왕이 절로 들어와 머물 수 있도록 했다고 전한다. 바닷물이 실제로 이곳까지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인들이 바다와 절, 죽은 왕과 살아있는 나라를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하려 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감은사는 바다의 왕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마련한 상징적 공간이자, 아버지의 미완을 아들이 건축으로 완성한 장소였다. 그곳에서 동쪽 바다를 향해 서면,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도 바람이 탑 사이를 지나 동쪽으로 흘렀다. 그 바람을 타고 용의 전설이 들려온다.


◆ 용을 보았다는 자리


이견대 정자 기둥 사이로 문무대왕릉과 동해가 펼쳐진다.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설화는 문무왕과 신문왕, 감은사와 이견대, 동해를 하나의 이야기로 잇는다. 바다에 남은 왕의 기억은 아들의 시대에 나라를 지키는 용과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견대 정자 기둥 사이로 문무대왕릉과 동해가 펼쳐진다. 삼국유사의 만파식적 설화는 문무왕과 신문왕, 감은사와 이견대, 동해를 하나의 이야기로 잇는다. 바다에 남은 왕의 기억은 아들의 시대에 나라를 지키는 용과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감은사지를 내려와 다시 바다 쪽으로 향하면 언덕 끝에 팔작지붕의 정자 하나가 나타난다. 신문왕이 바다의 용이 된 아버지를 보았다고 전해지는 자리, 이견대다. '이견(利見)'이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는 구절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계단을 올라 정자 마루에 서면 정자의 기둥이 액자처럼 바다를 가르고, 그 사이로 문무대왕릉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오를 때는 보이지 않던 대왕암이 마루에 발을 딛는 순간 바다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낸다. 정자와 바다가 빚어내는 장면이 드라마틱하다.


대종천과 동해가 합류하는 지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삼국유사』는 신라의 신비로운 이야기 하나를 시작한다.


신문왕 2년인 682년, 동해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물결을 따라 감은사를 향해 떠왔다. 산 위에는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로 갈라지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신문왕이 점을 치게 하자,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천신의 아들로 여겨진 김유신이 나라를 지킬 보물을 내리려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신문왕은 이견대에 행차해 바다에 떠온 산을 바라보고 사람을 보내 살피게 했다. 이윽고 배를 타고 산으로 들어가자 용이 나타나 검은 옥대를 바쳤다. 왕이 대나무가 갈라지고 합쳐지는 까닭을 묻자 용은 이렇게 답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으로 쳐야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할 것입니다."


신문왕은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고 월성의 천존고에 보관했다.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장마에는 날이 개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물결도 평온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피리의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했다.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라는 뜻이다.


만파식적은 길고 참혹한 통일전쟁을 끝낸 신라가 무엇을 간절히 바랐는지 보여주는 상징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난 나라에는 서로 다른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힘이 필요했다. 문무왕이 통일을 완성했다면, 신문왕에게 남은 과제는 그 통일을 평화로운 일상으로 바꾸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자 마루에는 에어컨보다 시원한 바람이 끝없이 불어왔고, 아래로는 대종천이 동해와 몸을 섞는 물길이 내려다보였다. 육지의 물과 바다가 만나는 이곳에서 '모든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를 꿈꿨다는 이야기가 그저 먼 옛날 이야기처럼만 들리지 않았다.


천 년 전 신라인들은 온갖 파도를 잠재우는 피리를 꿈꿨다. 오늘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음속 파도가 잦아들기를 빈다. 기도의 말은 달라졌지만, 바다 앞에서 바라는 것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부디 무사하기를, 부디 이 파도가 잠잠해지기를.


경주의 바다는 오늘도 사람들의 염원을 듣는다.


[주말의 길]


절터에서 바다로, 문무왕의 마지막 길을 따라


감은사지 -> 문무대왕릉 -> 이견대


문무대왕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길은 감은사지에서 시작한다. 탑 사이로 난 길을 걷고, 왕이 잠든 바다까지 내려간 뒤, 마지막으로 이견대에 올라 그 바다를 다시 바라보는 여정이다. 전체 이동 거리는 약 3㎞ 안팎이며, 장소마다 차를 세우고 천천히 둘러보는 편이 좋다.


문무대왕릉이 위치한 해변에는 봉길해수욕장이 개장했다. 동해안의 다른 해수욕장에 비해 피서객이 적어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관람 포인트>


①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금당터 아래 석조 공간, 절터의 가람 배치


② 문무대왕릉; 봉길해변에서 바라본 대왕암, 대종천과 동해가 만나는 풍경


③ 이견대; 정자 기둥 사이로 바라보는 문무대왕릉과 봉길해변


글=이은임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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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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