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실컷 읽고 싶어서" "눈 오는 날 해남의 팥칼국수 집으로 즉시 뛰어가고 싶어서" 등 대의적인 멘트 대신 회사를 그만둘 때 하고픈 말들. <이미지= Gemini>
얼마 전 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뒀다. 직장에서는 흔히 있는 일로, 마지막 출근일 즈음엔 직원들 앞에서 고별사를 건넨다. 대부분 이런 멘트를 한다. '새로운 도전과 시작' '제2의 인생을 위한 휴식과 힐링' 혹은 '발전을 위한 아름다운 물러남' 같은 대의적이고 원대한 명분들이다. 저렇게 그만두는 용기가 부러울 때도 있지만, 그 옛날 미스코리아들의 단골 수상 멘트인 "OOO 미용실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처럼 너무 규격화되어 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뻔하디 뻔한 고별사에 좀 더 생명력을 불어넣을 방법은 없을까. 나의 고별사만은 특별하게, 누가 들어도 기억에 남을 퇴사 이유를 만드느라 십수 년째 분투 중임을 나는 고백한다.
자주 가던 동네 D카페. 손으로 내려주는 커피맛이 좋으며, 사진에는 없지만 와플과 같이 먹으면 한나절 졸지 않고 책을 읽거나 일을 하게 된다. 음악 소리도 크지 않아 딱 책 읽거나 일하기 좋았는데, 지금은 문을 닫았다. 조용하면 인기를 얻지 못하는 세태가 보인다. <본인 제공>
잠깐 예전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한때 우리 동네 카페 여사장님은 내가 조앤 롤링 같은 대작가가 될 거라 믿으셨는지 커피며 와플을 자주 베푸셨다. 당시 롤링이 해리포터를 에든버러의 '엘리펀트 하우스' 카페에서 집필했다 하여 그 공간이 신문에 날 때였다. 사장님은 내게 "상을 타는 날엔 꼭 D카페를 언급해달라"고 당부하셨다. 본의 아니게 사기가 되어버린 나의 행각은 지금의 회사로 정기출근을 하면서 조용히 막을 내렸다. 하지만 진짜로 수상을 한다면야 서문에 그 카페를 꼭 언급하리라 마음먹었었다. 미스코리아들처럼 "와플을 서비스로 주시어 오랜 시간 글에 정진하게 하신 D카페 사장님께 감사드린다"는 소감은, 근엄한 문학상 분위기에 얼마나 쌈박하고 인간미 넘치는 수상 멘트인가. 그러니 오늘도 미리 준비해 본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지독하게 사소해서 더 특별한, 회사를 그만두는 변(辨)들.
움베르토 에코의 책들. 좋아해서 그의 서거 후 세트로 나온 것들을 사모았다. 그렇다고 다 본 것은 절대 아니니, 이 또한 그의 행간 사이에서 길 잃은 바쁜 현대인의 초상이랄까. <본인 제공>
첫째,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실컷 읽고 싶어서.
해학과 미학이 깃든 그의 에세이를 좋아한다.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책에서 에코는 세관을 통과하기 위해 묘수를 쓴다. 정직하게 책을 구입했다고 신고했더니 오히려 책으로 무얼 위장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다음엔 남들처럼 비싼 위스키 한 병을 사서 책 사이에 끼워놓고는 안절부절하는 연기를 펼쳤다. 그러자 세관원은 '고작 한 병으로 쫄지마라'며 봐주더라는 것이었다. 거대한 시스템의 허점을 찔러 웃음을 유발하는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그처럼 위대한 기호학자가 되고 싶고, 그를 따라 이탈리아 곳곳을 여행하고 싶어진다. 에코가 생전에 남긴 저작은 벽돌 같은 소설 7권, 학술서 30권, 에세이 10권, 동화책 3권 등 총 50여 권에 달하는데, 이를 언제 다 읽는단 말인가. 회사를 그만두는 비장한 결심이 아니고서야 내 생애 이 대업을 이룰 자신이 없다. 그저 에코의 묘지 앞에 찾아가 시원한 소맥 한 잔 말아 올려 드리고, 활자 속을 유영할 시간을 온전히 벌고 싶을 뿐이다.
해남 팥칼국수. 설탕을 한 숟가락 타는 것이 별미의 비법이다. 냉면 사발만큼의 양이라 많지만, 남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달콤 따뜻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도 일상을 버티는 힘이 된다. <본인 제공>
둘째, 눈 오는 날 해남의 팥칼국수 집으로 즉시 뛰어가고 싶어서.
경상도에서 팥은 팥죽이나 팥시루떡 정도지만, 호남에서는 직접 민 칼국수 면을 걸쭉한 팥국물에 말아먹는다. 여기에 필히 설탕을 큰 숟갈 가득 넣어 휘저어 먹으면, 달디 단 뜨거움이 황홀할 만큼 좋다. '거 괜히 애쓰고 있어. 술술 넘기며 살아라'는 위로가 목젖을 타고 내려간다. 땅끝마을 해남에는 눈이 자주 오는데 해남 아래쪽에 주인장 이름을 건 팥국수 집이 있다. 눈 오는 날은 대기표를 받고 기다려야 한다. 그 집의 절인 배추 반찬은 별 양념도 안 했는데 왜 그리 눈 돌아가게 맛있는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몇 해 전 겨울아침 출근길, 앞산에 쌓인 눈을 보면서 이대로 핸들을 돌려 해남으로 떠난다면 참 행복하겠다 싶었다. 인생의 만족은 즉시성 아닌가. 자장면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으면 즐거운 것처럼, 인생은 계획보다 즉시성이다.
해남 대흥사 입구. 겨울에 가면 대흥사 올라가는 길이 참 조용하고 특유의 운치가 있다. <본인 제공>
셋째, 비수기 초저가 항공권을 사고 싶어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여행은 늘 명절 연휴나 여름휴가 시즌에 가게 된다. 이럴 때 항공권은 연중 최고가. 친구들은 50만원짜리 파리행 티켓을 끊었느니, 10만원 이하로 도쿄에 다녀왔느니 자랑하지만 내겐 언감생심이다. 나도 날짜에 구애받지 않는 초저가 티켓팅에 성공하여, 내 좌석값이 비행기 기름값 본전에도 못 미치는 미안함 섞인 희열을 맛보고 싶다. 대신 항공사 별점이라도 팍팍 남겨주면, 서로 얼마나 좋아!
이런 쓰잘머리 없는 이유로 회사를 그만둔다면 "겨우 그것 때문에?"라며 혀를 찰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나이쯤 살아보니 비로소 깨닫게 된다. 신문 1면을 장식하는 거대한 정치적 이슈나 경제지표의 등락 같은 대의적 사건들이 내 삶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정작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반대로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눈에 띄지 않는 '사소함'들이었다. 강아지의 재롱에 별사탕 같은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반대로 누군가가 툭 던진 뾰족한 말 한마디에 가슴을 베여 밤새 잠 못 이룬 경험이 다들 있으실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이란 거대한 대리석 건물이 아니라, 매일매일 묵묵히 쌓아 올리는 사소한 모래 알갱이들의 집합체인 셈이다.
"사소한 일들이 인간을 지배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거대한 파도에는 의연하게 버티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한 물방울에는 자신도 모르게 쉽게 젖어드는 법이다." (소설 '레미제라블' 중에서)
매일 정성스레 쌓아올려지는 사소한 축적의 위대함을 이제야 비로소 안다. 거창한 대리석이 아닌 신발 속 모래알 하나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하고도 솔직한 인생이니까. 따라서 나는 오늘도 기발하고 엉뚱한 퇴사의 변을 품은 채 출근한다. 당장 해남으로 달릴 수는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사소한 도피처들을 마음 한구석에 마련해뒀기에 오늘의 일상을 버텨낼 근육이 생긴다. 언젠가 펼쳐질 나만의 위대한 고별사를 준비하며, 오늘 마주치는 동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한 뼘 더 다정해지기로 마음먹는다. 삶의 무게와 속도에 밀려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던 그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를 온전히 복권시키는 일, 그것이 내가 내 인생을 향해 이제야 털어놓는 찬가라 할까. 소중한 우리 인생, 아이 러브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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