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등록 외국인도 90일 이상 경주 거주 입증하면 입원·수술비 지원
2만명 넘는 외국인 주민, 산업현장 한 축…“아파도 병원 못 가는 사람 있어”
4개 병원에 시범예산 3천만원…정확한 수요 파악·지원 지속성은 과제
경주시는 지난 6월 시청 대회의실에서 베트남·중국·우즈베키스탄 등 8개국 출신 외국인 주민 13명으로 구성된 '2026년 경주시 외국인주민 명예통장단 시범운영단' 위촉식을 열었다. 시는 9월부터는 의료보장 사각지대에 놓인 외국인주민을 대상으로 의료비 지원사업을 시행한다. 경주시 제공
"몸이 아파도 병원에 잘 안 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주시 외동읍의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하는 파키스탄 출신 근로자 S.알리씨(45)는 주변 외국인들의 병원 사정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건강보험이 없거나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외국인 가운데는 몸이 아파도 참고 버티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 13년 넘게 생활해 온 알리씨에게 이런 모습은 낯설지 않다. 경주시가 다음 달부터 건강보험 등 의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에게 입원·수술비를 지원한다고 설명하자 그는 여러 차례 필요성에 공감했다.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신청할 수 있도록 함께 알아보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경주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기준 외국국적동포와 고려인 등을 포함한 외국인 주민은 2만698명으로 전체 경주 인구의 9.7%를 차지한다. 경북 시·군 가운데 두 번째로 많다. 자동차부품업체가 밀집한 외동읍을 비롯해 제조업과 농업 현장 곳곳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은 이미 지역 노동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건강보험 등 의료제도 밖에 놓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행정에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미등록 외국인은 공식 통계만으로 거주지나 의료 수요를 확인하기 어렵다.
경주시가 오는 9월 1일부터 시작하는 '외국인주민 의료비 지원사업'이 눈길을 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주에 90일을 초과해 거주하는 외국인주민뿐만 아니라 미등록 외국인도 지원 대상에 포함된다.
대상은 경주에서 90일 이상 거주하면서 건강보험 등 다른 의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고 기준중위소득 100% 미만인 외국인주민과 자녀다. 질병이나 부상으로 입원·수술 또는 이에 준하는 시술을 받을 경우 의료비 500만원 범위에서 지원한다. 본인이 10%를 부담해 실제 경주시 지원액은 1인당 최대 450만원이다.
관건은 행정시스템에 등록돼 있지 않은 외국인이 '경주에서 90일을 살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느냐다.
경주시는 임대차계약서뿐 아니라 집주인의 거주 확인, 고용주의 확인, 급여 계좌이체 기록 등 실제 생활 과정에서 남은 자료를 활용하기로 했다. 외국인등록증이 없어도 경주에서 일하고 살아온 생활 흔적을 확인해 지원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경주시 외국인공동체팀의 고청산 주무관은 "미등록 외국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며 "인근 지자체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 몰리는 경우 등을 막기 위해 적어도 90일 이상 경주에서 생활했다는 사실이 확인돼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의료 사각지대 문제는 이미 경주시의회에서도 제기됐다.
올해 1월 경주시의회 행정복지위원회에서는 미등록 외국인이 긴급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경주에서 해결하지 못해 다른 지역까지 가야 하는 사례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문제를 제기했던 이경희 경주시의원은 27일 영남일보와의 통화에서 한 종교단체가 치료가 필요한 미등록 외국인을 포항까지 데려가 의료진의 도움을 받아 응급치료를 받게 했다는 사연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 의원은 "그런 현실이 있다면 경주 안에서도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며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응급상황을 맞았을 때 최소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행정에서도 찾아줘야 한다"고 말했다.
경주시가 이번 사업을 시작하면서 기존 외국인 의료지원 방식도 바꿨다.
그동안에는 민간단체에 보조금을 지원해 의료봉사 등을 하는 방식으로 외국인 의료지원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시가 당초 기대했던 것과 달리 간단한 진료나 처치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아 큰 부상이나 수술로 목돈이 필요한 외국인에게 직접 도움을 주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게 실무진의 설명이다.
시는 올해 기존 보조사업을 폐지하고 환자에게 실제 발생한 입원·수술비를 경주시가 직접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지원금도 개인에게 현금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지정 의료기관이 신청을 접수하면 경주시가 대상 여부와 의료비 적정성을 심사한 뒤 병원에 지급한다.
동국대경주병원 기획예산팀 이보영 담당은 "건강보험이 없는 일부 외국인 환자들이 급하게 병원을 찾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다만 이들의 정확한 진료 건수나 미수 의료비 규모를 별도로 산출해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문제는 사업 규모다. 올해 9월부터 연말까지 책정된 예산은 3천만원이다. 동국대경주병원과 계명대 경주동산병원, 경주굿모닝병원, 큰마디큰병원 등 4개 의료기관이 함께 참여한다.
1인당 실제 지원금이 최대 450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수술 등 비교적 큰 치료를 받는 환자가 몇 명만 발생해도 예산이 빠르게 소진될 가능성이 있다. 병원 원무팀에서도 사업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전체 예산 3천만원으로 실제 몇 명까지 지원할 수 있을지는 가늠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나온다.
경주시도 정확한 수요를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건강보험이나 산재보험 등 기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외국인은 빠지는 반면 체류자격 변화 과정에서 의료보장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나 미등록 외국인은 숫자 자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는 올해 사업을 통해 실제 신청 규모부터 확인한다는 계획이다. 연말 집행 결과와 의료기관 의견을 분석해 내년도 사업 확대 여부를 결정한다. 실무부서에서는 수요가 확인될 경우 내년 예산을 5천만원 이상, 1억원 미만 규모까지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고청산 주무관은 "3천만원이 충분한 금액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며 "올해는 실제 어떤 수요가 들어오는지 확인하는 시범사업의 성격도 있다. 연말에 사업을 정산한 뒤 문제점을 보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장성재
동부지역본부 소속입니다. 경주의 현장을 기록하고 지역의 변화를 전합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