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
"무협지 화법으로 말하자면 난 '만독불침'의 경지다. 포지티브가 아니라 네거티브 환경에서 성장했다. 적진에서 날아온 탄환과 포탄을 모아 부자가 되고 이긴 사람이다." 대통령 이재명이 경기도지사 시절인 2018년 11월 1일 기자간담회에서 그간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정면돌파 의지를 강조하면서 한 말이다.
무협지에 나오는 '만독불침(萬毒不侵)'은 어떠한 독에도 당하지 않는 갑옷이다. 당시 이 낯선 말에 대해 "아니 무슨 시대착오적인 무협지 타령을 하는 거야"라면서 비웃은 사람들도 없진 않았을 게다. 하지만 그들도 2024년 12·3 계엄 이후엔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윤석열의 계엄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외쳤듯이 그야말로 '미친 짓'이자 '자폭'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만독불침'엔 적의 정신상태마저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이 있단 말인가? 어떤 이는 이미 계엄 이전에 이재명을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했지만,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를 스스로 이재명에게 헌납한 일련의 '미친 짓'은 정말 이재명이 "하늘이 내린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일지라도 그런 이야기로 끌고 가면 개연성이 전혀 없다고 욕먹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7년 전인 2019년 9월 6일 이재명은 항소심에서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죄가 유죄로 인정돼 벌금 300만원형을 받고 경기도지사 당선무효 위기에 몰렸다. 그는 대법원 판결을 5개월 앞둔 2020년 2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이제 인생의 황혼녘에서 경제적 사형은 두렵다. 전 재산을 다 내고도 한 생을 더 살며 벌어도 못 다 갚을 엄청난 선거자금 반환 채무와 그로 인해 필연적인 신용불량자의 삶이 날 기다린다." 이재명은 7월 16일 대법원의 무죄 선고 직후 "지금 여기서 숨쉬는 것조차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지옥에서 천당, 다시 천당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리고 이런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재명은 결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윤석열은 감옥에 갇혔다. 이젠 그 누구도 이재명의 '만독불침'을 감히 비웃진 못할 게다. 바로 여기서 '해피엔딩'으로 드라마가 끝나면 좋으련만, 그게 그렇질 않으니 알다가도 모를 게 인생이요 세상사다.
최근 '불륜 스캔들'로 좀 망가지긴 했지만,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의 말 중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명언이 하나 있다. "성공은 나쁜 스승이다. 그것은 합리적인 사람들조차 자신은 패배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이걸 '만독불침 병'이라고 본다면, 이재명은 대통령이 된 후에 이 병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최소한 이재명 정부에서는 그런 일(재난 사고)은 절대로 벌어질 수 없다."(2025년 6월 12일) "시장을 이기는 정부도 없지만, 정부를 이기는 시장도 없다."(2026년 1월 25일) "부동산 정상화는 계곡 정비보다도 훨씬 쉽다."(2026년 1월 31일) "하늘이 제게 생명 보전을 넘어 큰일까지 맡겨 주셨다."(2026년 5월 9일) "올해를 세계 어떤 나라도 대신할 수 없는 '대체 불가 대한민국'의 담대한 꿈이 시작된 해로 삼겠다."(2026년 6월 8일)
열심히 잘해보자는 응원 구호로는 어울릴지 몰라도 대통령의 언어치고는 지나친 오만의 냄새를 물씬 풍긴다. 그간의 '만독불침'은 사람이나 세력과의 싸움이었기에 결의를 다지는 의미에서 어느 정도의 허풍이 용인될 수도 있었지만, 국가정책 집행은 그런 싸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어떤 정책에 대해서건 겸손하고 또 겸손한 자세로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은 없을지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속으론 아무리 증오·혐오의 대상일지라도 야당과 반대세력의 비판이나 비난엔 귀담아들어야 할 게 없을지 경청하고 또 경청해야 한다.
그런데 어찌된 게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야당을 완전히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려고만 든다. 지도부가 '윤 어게인'에 빠져 있는 국민의힘은 무시받아 마땅하거니와 아예 상종할 가치조차 없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꽤 있는 건 분명하지만, 부동산·주식 등과 같은 경제·민생 문제는 대통령과 여당이 국민의힘에 비해 상대적 우월성이나 비교우위를 주장할 그 어떤 근거도 없잖은가.
나는 4년 전 경향신문 칼럼(2022년 8월3일자)에서 윤석열 정권을 향해 "오만은 당파적일 때 가장 치명적이다"는 말이 있다며 이런 고언을 한 바 있다. "그런 치명(致命)의 갈림길에 선 윤석열이 살 길은 딱 하나다. 지난 대선에서 자신이 0.73%포인트 차이로 패배했을 경우를 늘 상상하면서 사는 것이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에 눈을 돌리면서, 오만 대신 겸손, 불만 대신 감사의 자세를 갖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민주당의 치명적인 문제도 당파적 오만이다. 내부에서 나름 치열한 노선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싸우는 양쪽 모두 당파적 오만에 관한 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정권을 장악한 집권세력 파벌 중 '정신적 밥그릇'의 우위를 누가 차지하느냐 하는 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이 망조가 들었으니, 그런 정치적 여유와 풍요를 만끽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파성과 진영주의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좋은 점도 있고 불가피한 점도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치는 진영과 파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라가 어떻게 되건 말건 별 관심도 없는, 극단적 수준의 당파성과 진영주의에 매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단으로만 치닫는 강성 팬덤이 자기 집단 안팎에서 싸움을 벌이고 정치인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는 게 정치의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통령에게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의지는 없는 것 같다. '만독불침 신화' 때문이다. '만독불침'에 대한 믿음은 그 어떤 장점에도 불구하고 겸손 대신 오만을 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그 믿음과 힘 덕분에 대통령이 되었겠지만, 자신은 패배할 수 없다는 믿음은 이제부턴 독약이다. 오만 대신 겸손, 불만 대신 감사의 자세를 갖고 눈물과 피와 땀으로 민생을 돌보면서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숨쉬는 것조차 감사하던 시절로 되돌아가 그 초심을 지키는 게 그리도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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