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만세를 부른다”…총칼에도 꺾이지 않은 영해의 기상
영해 3·18독립만세운동이 열린 영덕 영해만세시장. 1919년 3월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한 김세영은 태극기를 만들고 기독교도와 농민층 등을 광범위하게 규합하고 사전 준비를 했다.
김세영·권태영 주도 영덕 전역 확산
양반·기독교인·농민 등 대규모 규합
경찰주재소·학교 부수며 순사들 감금
일본군 발포에 8명 순국·16명 부상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이 거행되었다. 그와 동시에 서울 파고다공원을 비롯한 이북의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시작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는 3월 중순경까지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었고 국외지역 동포사회까지 확산되어 갔다. 서울에서 발송된 선언서가 지방 유지들에게 전달되었고, 고종의 장례식을 위해 서울로 올라왔던 사람들은 시위현장의 열기를 그대로 가슴에 품은 채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 교회 조사였던 김세영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거국적으로 전개된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했고,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 만세운동의 상황을 전했다.
영덕 영해만세시장 부근에 있는 영해 3·18독립만세운동기념탑. 교회 조사였던 김세영은 신학교 입학을 위해 평양으로 가던 중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목격한 뒤, 고향 영덕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3월12일, 고향으로 돌아온 김세영은 평소 친분이 두텁던 구세군 참위 권태원을 만났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서울·평양, 대구지방에서는 기독교도, 천도교도는 물론 각 학교 학생들도 모두 그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독립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불국(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서 각국이 모두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하여 벌써 파란(폴란드) 등 기타 속국은 독립이 승인되었다. 인도는 또 논의 중에 있다. 우리 조선 민족도 2명의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독립을 청원하고 있다. … 우리 지역에서도 동지를 규합해 독립만세시위운동을 하면 어떠한가. 나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권형이 병곡면 송천동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정규하와 상의하여 동지를 규합한 후 영덕면내에서 거사를 해주기 바란다."
김세영은 권태원을 영해면의 정규하에게 보냈다. 영덕면의 강우근과 김우일에게는 김혁동을, 지품면의 김태을과 주명우에게는 김중명을 각각 보내 함께할 것을 권했다. 만세운동 소식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져 영덕 전체로 퍼져나갔다. 김세영, 권태원, 정규하를 중심으로 한 영덕사람들은 3월18일 영해읍 장날을 거사일로 정했다. 그들은 태극기를 만들고, 군내 토착 양반인 권·남·박·이·백 등 5성을 중심으로 영해면, 병곡면, 축산면, 창수면 일대의 기독교도 및 농민층을 광범위하게 규합하는 등 사전 준비에 만반을 기했다.
권태원은 3월17일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 호응을 얻어냈다고 한다.
"1919년 3월 나는 서울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었다. 조선이 독립을 외치고 있다는 말, 세계는 민족자결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 그 순간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영덕의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마을의 어른들과 교인들을 설득했다. 이제 우리도 일어나야 합니다."
1919년 3월18일 영해시장에는 2천명의 군중이 모여있었고, 정규하와 박의락이 만세를 외쳤고 군중의 외침이 뒤따랐다. 일제시대 영해주재소가 있었던 영해파출소 외벽에 설치된 영해장터거리 근대역사문화공간 조형물.
영덕 영해만세시장 부근에 있는 영해 3·18독립만세운동기념탑.
◆일제를 놀라게 한 영해 3·18독립만세운동
3월18일 12시쯤, 정규하는 대형과 중형의 태극기 각 1개씩과 소형 태극기 약 40개를 가지고 영해시장으로 잠입했다. 시장에는 남효직, 남세혁, 박의락 등 주동 인물들과 약 2천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정규하는 영해주재소(지금의 영해파출소) 앞뜰에서 가지고 온 소형태극기를 시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오후 1시쯤, 정규하와 박의락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모든 군중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싸전(쌀집) 부근에서는 남세혁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의 외침이 뒤따랐다. 온 시장통에 독립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장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펼친 시위대는 일본 순사와 순사보에게도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호통을 쳤다. 위세에 제압당한 일경은 순순히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인근 공립보통학교로 몰려가 학생들에게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권한 뒤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이때 일본인 순사부장이 나타나 거만한 태도로 시위대에 해산을 요구하며 대형 태극기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곤봉과 돌을 들고 주재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 일본인 순사부장을 넘어뜨리고 순사 2명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주재소 안의 모든 유리창과 가구들을 파괴하고 서류들을 찢어버렸다. 이후 시위는 공격적으로 바뀌었다.
영해 3·18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건물.
순사부장은 몰매를 맞아 중상을 입었고 순사와 순사보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갔다. 주재소를 박살낸 시위대는 다시 공립보통학교로 향했다. 교원이 모두 숨어버리고 나타나지 않자 분개한 시위대는 학교건물의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대부분 파괴했다. 이어 일본인들이 다니는 공립소학교로 쳐들어가 건물을 부수고 학적부와 공문서를 파기했으며 차례로 우편소와 면사무소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며 파괴하였다.
"폭도 1천여 명이 영해주재소로 몰려왔다"는 보고를 받은 영덕경찰서장은 순사와 순사보 4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16㎞를 달려와 이날 오후 3시 반경 영해주재소에 도착했다. 서장 일행이 가져온 총기로 무장한 일경들은 시장 부근에서 휴식 중이던 시위대에 해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오히려 이들을 둘러싸고 압박했고, 위협을 느낀 서장 일행은 주재소 안으로 피신했다.
쫓아온 시위대가 무기 탈취를 시도하고 폭행을 가하자 서장 일행은 다시 경찰서가 있는 영덕면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멀리 가지 못했다. 서장과 순사는 영해면과 영덕면 사이에 있는 축산면 상원동에서 추격조와 축산면 주민 등 100여 명에게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서장은 속옷과 제복이 찢어졌고,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깨져 한때 정신을 잃기도 했다.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서장은 전신 16곳에 상처를 입었다. 서장 등 3명은 영해면으로 다시 끌려와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감금됐다.
◆일본군의 집단 발포로 막 내린 영해 만세시위
만세 시위는 인접한 병곡면까지 이어졌다. 정규하가 이끈 시위대 400~500명이 8㎞ 떨어진 병곡면으로 이동해 경찰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를 파괴했으며, 다시 영해읍으로 돌아와 밤이 새도록 시내를 누비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을 몰아내고 영해면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해방감에 들떴다. 시위 지도부는 3월18일 영해면과 병곡면 시위가 끝나자 19일에도 시위를 계속하기로 정했다. "내일도 똑같이 만세를 부른다!" 19일 아침부터 영해면 시장 부근에 600~700명이 모여들었고, 만세운동이 재개됐다.
오전 11시쯤 포항 헌병 분대장 등 헌병 6명이 영해에 도착했다. 이들은 15시간 이상 여관에 감금돼 있던 서장을 구출했지만 시위대의 위세에 해산을 시도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오후 4시가 되자 대구에 주둔해있던 80연대 병력이 영해 땅을 밟으면서 일제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됐다. "폭도들이 영해의 주재소와 학교 등을 파괴하고 전화를 불통 상태로 만들었다"는 보고를 받은 도장관이 80연대의 영덕 출동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구에서 포항까지 자동차로 이동한 뒤 기선을 타고 영덕에 도착했다. 남산에 진을 친 80연대 병력과 포항헌병대, 그리고 일경은 시위대에 해산을 명령하고 공포탄을 쐈지만 시위대는 위축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결국 일본군은 실탄 사격을 시작했고,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부상당했다.
일본군의 집단 발포로 영해에서의 만세운동은 끝났지만 병곡면, 창수면, 영덕읍, 지품면 등으로 퍼져나갔다. 3·18 영해만세운동이 펼쳐진 영덕 영해만세시장 곳곳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권태원은 1919년 3월18일 영해시장에서의 만세운동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태극기를 흔들며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사람들은 함께 따라 외쳤고 시장은 순식간에 독립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우리는 일본 경찰과 관공서를 향해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파괴가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의 절규였다. 그날 오후 나는 다시 병곡으로 향했다. 총을 겨눈 헌병들 앞에서도 사람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더 많은 희생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우리는 해산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진보로 숨어들어 다시 사람들을 모았다. 그리고 또 외쳤다. 대한독립만세! 결국 나는 체포되었다. 차가운 감옥 안에서도 내 마음은 무너지지 않았다. 나는 믿었다. 언젠가 반드시 조선이 다시 일어설 거라고."
일본군의 집단 발포로 영해 만세 시위는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이후 만세의 함성은 이웃 병곡면, 창수면, 영덕읍, 지품면 등 영덕 곳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