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4대 사고로 국가 핵심 기록 보관
1538년 화재 후 다른 사고본으로 실록 복원
봉안·포쇄 재현 통해 기록문화 가치 재조명
‘참한 성주 하루여행’ 시작…정규 코스 연계는 과제
성주사고가 있는 성주역사테마공원으로 오르는 길. 석현철 기자
성주역사테마공원의 성주읍성 북문을 통과하면 왼쪽에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다. 지위가 높은 관리든 평범한 백성이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뜻을 새긴 비석이다.
사람이 아니라 기록 앞에서 말에서 내려야 했던 곳. 비석 너머에는 조선왕조의 기억을 보관하던 성주사고(星州史庫)가 있었다.
성주역사테마공원 내에 위치한 성주사고.석현철 기자
현재 성주사고는 실록각과 관리사로 재현돼 있다. 겉으로 보면 단정한 전통 건축물이지만 그 안에 담긴 역사는 결코 가볍지 않다. 왕의 언행과 국정 운영, 전쟁과 재난, 백성의 삶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국가 기록보존시설이자 조선 전기 영남권 기록문화의 중심지였다.
지난달 22일 성주사고에는 다시 사람들의 발길이 모였다. 농악대의 길놀이가 성주읍성 안을 깨우고 조선왕조실록을 옮기는 이안(移安) 행렬이 실록각을 향했다. 사관과 관리 복장을 갖춘 참가자들은 실록을 사고에 모시는 봉안의례를 재현했다.
성주사고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하마비(下馬碑). 석현철 기자
실록을 꺼내 상태를 점검하고 바람을 통하게 하는 포쇄(曝曬) 재현과 창작 판소리도 이어졌다. 국가유산청 공모사업인 고택·종갓집 활용사업과 연계해 마련된 '조선왕조실록 봉안 및 포쇄 재현행사'다. 주민과 관광객 등 150여 명이 참여했다.
600년 전 나라의 기록을 지키던 성주의 시간이 의례와 공연, 사람의 움직임을 통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조선은 왜 성주에 나라의 기억을 맡겼나
성주사고 전경. 석현철 기자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의 472년 역사를 연월일 순서로 기록한 국가 기록물이다. 왕의 말과 행동은 물론 정치와 외교, 국방, 경제, 사회, 문화, 자연재해와 백성의 생활까지 담았다.
실록은 다음 왕이 즉위한 뒤 전왕의 시대를 정리해 편찬했다. 완성된 실록은 왕조의 정통성과 국가 운영의 근거가 됐지만, 왕조차 마음대로 열람할 수 없었다. 권력자가 자신에게 불리한 기록을 고치거나 없애지 못하도록 사관의 독립성과 기록의 비밀을 보장한 것이다.
성주사고 정문. 석현철 기자
조선 초기 실록은 한양의 춘추관사고와 충주사고에 나눠 보관했다. 그러나 두 곳만으로는 화재와 전쟁이 발생했을 때 기록 전체를 잃을 위험이 컸다.
세종은 1439년 경상도의 성주와 전라도의 전주에 사고를 추가로 설치했다. 이어 1445년 태조·정종·태종실록 등을 다시 인쇄하거나 베껴 춘추관·충주·전주·성주에 분산 보관했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체제가 완성된 것이다.
성주가 국가 핵심 기록을 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성주는 성주목이 설치된 영남 내륙의 행정 중심지였다. 중앙과 연결되는 교통 여건을 갖췄고 실록과 사고를 관리할 행정력과 인력도 확보하고 있었다.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 행사에 풍물패들의 흥겨운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성주군 제공
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실록을 맡겼다는 사실은 조정이 성주목의 위상과 관리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는 의미다. 성주사고는 책을 쌓아둔 창고가 아니라 성주가 영남권 정치·행정·지식문화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주는 국가시설이었다.
박재관 성주군 고분군전시관팀장(학예연구사)은 "사고는 건물만 세운다고 운영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다. 실록을 안전하게 봉안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행정력과 관리 인력, 교통 여건이 필요했다"며 "성주에 사고가 설치됐다는 사실은 조선 전기 성주목이 영남의 주요 행정·문화 중심지였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라고 설명했다.
◆2023년 포쇄에서 올해 봉안까지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2026년은 세종이 성주사고를 건립한 1439년으로부터 587년이 되는 해다.
성주군은 2020년 성주사고를 재현한 데 이어 2023년 처음으로 포쇄 재현행사를 열었다. 당시 행사는 실록의 보존 상태를 점검하고 바람을 통하게 하는 포쇄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올해는 실록을 사고에 들이는 봉안의례를 추가했다. 서울에서 출발한 실록이 지방 사고에 도착하기까지의 전체 이안 과정 가운데 실록이 성주사고 앞에 도착한 이후 봉안사와 사관, 성주목사의 감독 아래 실록각에 보관되는 절차를 재현한 것이다.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박 팀장은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사고에 봉안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했던 전통을 재현해 문화 원형의 중요성을 알리고, 성주에도 국가 핵심 기록을 보관한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이어 "2023년에는 포쇄를 중심으로 행사를 구성했지만 올해는 실록 봉안의례를 더해 실록 관련 행사의 완전성을 높이고자 했다"며 "실록이 사고 앞에 도착한 뒤 봉안사와 사관, 성주목사의 감독 아래 실록각에 보관되는 과정을 추가한 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록·승정원일기 토대로 의례 고증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행사에 사용된 복식과 의장물, 실록궤와 의례 절차도 임의로 구성하지 않았다.
성주군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실록 관련 의궤, 『국조오례의』, 『춘관통고』 등 기록자료를 토대로 봉안사·사관·성주목사 등 참여자의 직책에 맞는 복식과 의장물을 준비했다.
의례는 실록이 사고에 도착한 뒤 예를 올리는 국궁사배(鞠躬四拜), 세 차례 향을 올리는 삼상향(三上香), 봉안할 실록에 이상이 없는지를 확인하는 봉심례(奉審禮), 실록 봉안 등의 순서로 진행됐다. 포쇄 절차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실록 형지안(形止案)을 참고했다.
이러한 고증은 행사를 단순한 시대극이 아니라 기록에 근거한 문화유산 재현으로 끌어올리는 핵심이다. 재현의 화려함보다 당시 누가, 어떤 절차와 책임 아래 실록을 옮기고 확인했는지를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햇볕보다 바람으로 지킨 기록
종이로 만든 실록의 가장 큰 적은 습기와 곰팡이, 벌레였다. 사고에 넣어뒀다고 해서 수백 년 동안 저절로 보존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중앙에서 사관을 파견해 실록과 서책을 꺼내 상태를 점검하고 바람을 통하게 했다. 이것이 포쇄다. 한자 뜻만 보면 햇볕에 말리는 작업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종이와 먹이 손상되지 않도록 강한 햇빛을 피하면서 바람을 쐬는 것이 중요했다.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경국대전』은 선대 임금의 실록을 3년마다 열어 살피고 지방 사고에는 사관을 보내 포쇄하도록 규정했다. 다만 날씨와 교통 등의 사정으로 3년 주기가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포쇄는 단순한 건조 작업이 아니었다. 사관은 책이 빠지거나 훼손되지 않았는지 한 권씩 살피고 실록을 보관하는 궤의 상태도 점검했다. 작업이 끝나면 실록을 붉은 명주 보자기에 싸서 궤에 넣고 천궁과 창포 가루를 담은 주머니를 함께 넣어 습기와 벌레를 막았다.
사고의 문을 연 날짜와 이유, 참여한 관리, 서책의 수량과 보존 상태는 형지안에 기록했다. 오늘날의 기록물 관리대장이나 점검보고서에 해당한다.
박 팀장은 "포쇄는 실록을 밖에 꺼내 말리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라 습기와 충해를 방지하고 서책의 누락과 훼손 여부, 실록궤의 상태까지 확인하는 종합적인 기록물 점검 과정이었다"며 "사고 출입과 실록 상태를 형지안에 남긴 것은 조선이 체계적인 국가 기록관리 제도를 운용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분산 보관과 정기 점검, 출입 통제와 관리대장 작성은 현대 기록관리에서도 적용되는 기본 원칙이다. 600년 전 성주사고는 자연 통풍과 방충 약재, 행정적 관리체계를 결합한 당대의 기록보존시설이었던 셈이다.
◆1538년 화재…다른 사고본으로 되살린 역사
철저한 관리에도 재난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1538년 11월 6일 성주사고에서 불이 나 건물과 보관 서책이 소실됐다.
화재 원인은 당시에도 논란이 됐다. 조정에서 파견된 경차관은 관노가 사고 누각 위의 비둘기를 잡다가 떨어뜨린 불에서 화재가 시작됐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조정 일각에서는 성주 수령을 모함하려는 사람이 일부러 불을 질렀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사고 화재는 건물 한 채가 불탄 지역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국가의 역사가 사라진 중대한 사건으로 다뤄졌다. 중종은 사관을 현지에 보내 불타고 남은 기록이 있는지 조사하도록 했고, 사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관리의 책임도 물었다.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더 주목할 대목은 화재 이후다. 조정은 춘추관사고에 남아 있던 실록을 저본으로 성주사고본을 다시 만들었다. 분량이 많은 『세종실록』과 『성종실록』은 활자로 간행하고 나머지 실록은 베껴 쓰도록 했다.
한 곳의 기록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사고본을 바탕으로 복원할 수 있도록 한 분산 보관의 힘이 실제 재난에서 입증됐다. 오늘날로 치면 국가 핵심정보를 여러 장소에 복제해 두는 재난 대비 백업체계였다.
◆임진왜란이 삼킨 성주의 기록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다시 제작된 실록은 성주사고에 봉안됐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더 큰 위기를 맞았다.
춘추관·충주·성주사고에 보관됐던 실록은 전쟁 과정에서 모두 소실됐다. 전주사고본만 태인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 경기전 참봉 오희길 등이 실록과 태조 어진을 내장산으로 옮긴 덕분에 화를 면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전주사고본은 임진왜란 이후 실록을 다시 제작하는 모본이 됐다. 전주사고본 한 질마저 지켜내지 못했다면 태조부터 명종에 이르는 조선 전기의 상당 부분은 오늘날과 같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임진왜란은 사고의 입지까지 바꿨다. 조선은 전쟁 이후 인구가 밀집한 고을 안보다 외적의 접근이 어려운 깊은 산과 섬이 기록 보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태백산·오대산·묘향산과 강화도 등지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했다.
성주사고는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영남권 기록문화의 중심지는 지리지와 실록 속 기록으로만 남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의 '4대 사고 분산 보관' 원칙은 현대 IT 산업의 핵심인 '데이터 센터 이중화(DR, 재해복구)' 개념과 완벽히 일치한다.
1538년 성주사고 화재 당시 춘추관사고의 실록을 저본으로 다시 복원해 낸 사례는, 한 곳의 서버가 다운되어도 다른 곳의 백업 데이터로 시스템을 살려내는 현대의 클라우드 백업 시스템과 다를 바 없다.
성주사고를 단순히 '옛날 책 창고'로 소개할 것이 아니라, '600년 전 조선판 데이터 백업 센터'라는 현대적 관점의 브랜딩을 입힌다면 젊은 세대의 흥미를 훨씬 강하게 끌어당길 수 있다.
◆옛터 복원 아닌 '기억의 재현'
8월22일 열린 성주사고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현재 성주역사테마공원에 들어선 성주사고는 옛 건물을 원래 자리에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다. 성주사고의 정확한 위치와 건축 형태를 확정할 만한 유구와 자료가 충분히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주군은 전주 경기전의 전주사고와 조선 전기 사고 관련 연구자료 등을 토대로 2020년 실록각과 관리사를 재현했다.
따라서 이곳을 단순히 '복원된 성주사고'라고 소개하면 방문객이 옛 사고 터에 당시 모습 그대로 다시 지은 건물로 오해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려면 사라진 성주사고의 기능과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 조성한 재현 공간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그렇다고 역사적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물과 실록이 모두 사라진 문화유산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달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박 팀장은 "현재 성주사고 내부에 상설전시가 마련돼 있지만 공간적 제약 때문에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성주사고가 재현 건축물을 관람하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실록의 편찬과 봉안, 포쇄를 배우고 체험하는 기록문화의 거점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전문 해설과 디지털 콘텐츠, 어린이·청소년 교육을 보강하고 성주읍성·성산동 고분군·세종대왕자태실·한개마을 등과 연계한다면 성주를 대표하는 역사관광 콘텐츠로 발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열린 봉안·포쇄 재현행사를 매년 단독으로 개최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성주군은 지역 축제 등의 부대행사로 재현 프로그램을 이어가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성주에 사고가 있는지 몰랐다"
8월22일 열린 성주사고 포쇄 재현행사. 성주군 제공
행사장을 찾은 주민들의 반응은 성주사고가 지닌 가능성과 현실적인 한계를 함께 보여줬다.
추귀양(53·선남면)씨는 "성주에서 오랫동안 살았지만 이곳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며 "이번 행사를 보면서 성주가 조선시대에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박용진(30·성주읍)씨는 "책을 바람에 쐬고 한 권씩 상태를 살피는 포쇄 과정을 보면서 조선시대 사람들이 기록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느낄 수 있었다"며 "행사가 한 번 열리고 끝나기보다 학생과 가족들이 직접 참여하는 체험 프로그램으로 정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선 전기 4대 사고 가운데 하나라는 역사적 가치가 지역 주민에게도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외지 관광객 유치에 앞서 주민과 학생이 성주사고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지역사 교육과 전문 해설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다.
시설을 재현하는 하드웨어 사업에 이어 이제는 성주사고만의 이야기를 담은 전시·교육·체험 등 소프트웨어를 보강할 차례다. 일회성 행사에 머무르지 않도록 지속적인 운영계획과 예산을 마련하고, 주민과 학생이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콘텐츠를 구축해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 120명, 성주사고에서 지역사 배운다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에서 전화식 성주군수와 행사관계자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성주군 제공
성주군은 외지 관광객 유치와 함께 지역 학생들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를 현장에서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성주청년회의소(JC)가 주최하는 '별고을 문화탐방'이 오는 10월 23일 열린다. 매년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에는 지역 초등학교 4학년생 120명이 참가해 성주의 주요 문화유산과 지역사를 탐방한다. 특히 올해 탐방 코스에는 성주사고가 새롭게 포함된다.
배민정 성주군 관광과 팀장은 "외지 관광객을 유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역의 미래 세대가 자신이 사는 고장의 역사를 먼저 이해하고 자긍심을 갖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며 "학생들이 책에서 배운 조선왕조실록과 사고의 역할을 현장에서 보고 체험하도록 매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문화탐방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생 대상 문화탐방에 성주사고가 포함되는 것은 지역 문화유산이 주민에게조차 낯선 현실을 다음 세대부터 바꿔가는 출발점이라는 의미가 있다.
다만 하루 동안 여러 문화유산을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학생 눈높이에 맞춘 해설자료와 체험 프로그램을 갖출 필요가 있다. 실록 모형을 궤에 봉안하고 포쇄와 형지안 작성을 체험하게 한다면 조선의 기록관리 방식을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라진 유산, 다시 써야 할 성주의 역사
8월22일 성주사고에서 열린 포쇄 재현행사를 마친 후 내빈들과 관계자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성주군 제공
오늘날 성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 원본도, 600년 전 건물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화재로 실록이 사라지자 다른 사고본을 다시 베껴 내려보냈던 기록과 습기와 벌레로부터 책을 지키기 위해 사고 문을 열었던 사관들의 노력은 전해지고 있다.
지난달 열린 봉안·포쇄 재현행사는 성주사고에 600년 전 의례와 사람의 움직임을 되돌려놓았다. 10월 23일 별고을 문화탐방은 성주사고를 지역의 미래 세대에 전하는 첫걸음이 된다.
성주읍성 북문 앞 하마비는 지금도 방문객을 맞는다. 600년 전 사람들이 그 앞에서 말에서 내려야 했던 이유는 사고 안에 보관된 것이 종이와 먹으로 만든 책에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한 나라가 자신을 기억하는 방식이 보관돼 있었다.
성주사고는 사라진 문화유산이다. 동시에 성주가 기록문화의 도시로 다시 써야 할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다.
석현철
지역의 변화와 사람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