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
중국 장춘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만주 지역에 괴뢰국 만주국을 세우면서 '신경(新京)'으로 불렸다. 일제가 '새로운 서울'을 건설하면서 중국 대륙 전체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넘보던 때였다. 일제는 신경에 먹고살 길이 있다고 부추겼고, 수많은 조선인들이 그 길을 찾아 방문하거나 이주했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 백석도 1940년 2월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신경으로 갔다. 백석은 조선일보사에 사표를 내고, '자야'라고 부르던 연인과도 헤어지고 난 후 압록강을 건너 드넓은 만주 벌판을 달려갔다. 조선에서 한글로 쓴 시를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은 거의 사라지고, 자신을 달구었던 사랑도 등을 돌리고, 강제징집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이 백석을 억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석은 만주국 경제부에서 일을 하며 몇 편의 시를 신경에서 써서 국내의 지면에 발표를 했다. '흰 바람벽이 있어'라는 절창이 거기에서 나왔으며, 또 '귀농'이라는 시도 신경에서 건졌다. "나는 이젠 귀치 않은 측량(測量)도 문서(文書)도 실증이 나고/ 낮에는 마음 놓고 낮잠도 한잠 자고 싶어서/ 아전 노릇을 그만두고 밭을 노왕한테 얻는 것이다"라고 썼다. 그 마을의 이름이 '백구둔(白狗屯)'이다. 나는 길림대 외국언어대학 한국어과 왕얀리 교수의 소개로 그 마을을 찾아 나섰다.
장춘역에서 2㎞ 남짓한 거리였지만 도로가 좁고 혼잡해 택시는 20여 분 후에 왕 교수가 알려준 자리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5층 정도의 연립주택형 아파트들이 들어선 농촌 마을이었다. 우리를 안내한 중국인 학생에게 '백구둔'이나 '충왕묘' 혹은 '토신묘'라는 단어로 좀 더 정확한 위치를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주민들은 모두 오백미터 남짓한 길 건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 삼거리 양쪽에 희한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래된 골동품, 도자기, 중고 카메라, 시계, 고서적, 수석, 반지 등 잡동사니들을 파는 노점 좌판들이 끝도 없이 도로 양쪽에 이어져 있었다. 주말마다 서는 벼룩시장이라고 했다. 좌판을 구경하면서 걷던 중에 작은 하천에 닿았고 거기에 '백구교(白狗橋)'라는 이름이 적힌 다리를 발견했다. 백구둔 마을이 분명했다. 백석을 만난 듯 반가웠다.
마을 입구에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각종 새를 파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왕(老王)은 채매도 힘이 들고 하루 종일 백령조(百鈴鳥) 소리나 들으려고/ 밭을 오늘 나한테 주는 것"이라고 쓴 '귀농'의 한 구절이 연상되었다.
백석이 농사를 짓기 위해 밭을 얻으러 왔던 곳, 백구둔을 찾은 김에 나는 욕심을 내 '충왕묘'나 '토신묘'가 있던 자리를 좀 더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80년이 훨씬 지난 시점에 중국 농촌의 샤머니즘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지나가던 할아버지에게 학생이 정중하게 물었더니 손사래를 치며 이런 반응이 나왔다.
"그런 미신 따위 나는 믿지 않아. 나는 마오쩌둥을 존경하는 사람이라구!"
우리는 그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씨에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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