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운동” 꺾이지 않은 항일의 외침
3월18일 영해면 성내장터에서 시작된 시위
영덕·병곡면 거쳐 19일 창수면으로 확산
지품면서는 24일 장날까지 세 차례 의거
4월4일 남정면까지 6개면 8번 항일 함성
만세운동으로 489명 체포…전국 최다
영덕의 3·1운동은 3월18일 영해 성내장터의 만세운동을 따라 이어졌다. 같은 날 영덕면과 병곡면에서 일어난 후 다음날인 19일에는 영해면과 지품면, 창수면에서도 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영덕 영해 3·1 의거탑.
영덕의 3·1운동은 1919년 3월18일 영해면 성내 장터에서 대규모 인원이 참여한 가운데 그 신호탄이 터졌다. 같은 날 오후 2시쯤에는 영덕면 남석동 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이어졌고, 오후 4시에는 병곡면 병곡동에서 주민 수백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 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만세운동은 하루에 그치지 않았다. 3월19일 아침, 영해면 성내동에서 다시 주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정오 무렵에는 지품면 원전동 시장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같은 날 창수면 읍내에서도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창수주재소를 공격하는 등 저항은 영덕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3월19일 영덕군 지품면 만세운동은 원전장로교회 주명우 목사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그는 기독교인 10여명과 종이 깃발을 흔들며 주재소를 향했다. 영덕 지품면 원전리에 있는 원전교회.
◆영덕면·창수면의 만세운동
영덕면에서는 금호리 예수교 북장로 교회 조사 강우근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그는 영덕면 화개동, 금호동, 남정면 남정동, 석보면 포산동 등지의 기독교인 50여명과 함께 장날인 3월 18일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영덕읍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2시 반, 장꾼이 가장 많이 모였을 때 강우근은 장터 한복판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장터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호응하였고 시장은 만세의 함성으로 진동하였다.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군경들은 주동 인물인 강우근을 비롯하여 20여명의 군중을 검거하였고 나머지 군중들은 총검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자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주민들과 합세하여 영덕경찰서를 습격하고 구속 중인 애국인사들을 구출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군경은 일본인 재향군인과 소방조합원 60여명을 긴급 소집하고, 강구에 급사를 급히 보내어 입항 중인 일인 어부 20여명의 응원을 요청하여 삼엄한 경계를 폈다. 이로 말미암아 구출작전은 실패했고 더 이상의 만세시위는 일어나지 못했다.
창수면에서의 만세운동은 영해 시위 소식을 들은 이종구가 1919년 3월19일 동민 10여명을 규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들은 시위 장소를 창수주재소로 정하고 시위 군중을 모으기 시작했다. 10명의 시위대는 곧 150여 명으로, 오후 4시쯤에는 40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창수주재소로 몰려갔다. 그리고 주재소를 완전히 장악하고 기물 등을 부수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을 무너뜨리고 공문서를 파기하였으며 주임순사가 숨겨놓은 물품과 서적 등도 파괴하였다. 창수주재소를 점거하여 시위를 펼치던 군중은 만세를 부른 후 오후 7시쯤 자진 해산했다. 뒤늦게 일본군 1개 분대가 파견되었지만 이미 시위대는 철수하여 인명피해는 없었다.
영덕 지품면 낙평리에 있는 3·18 만세운동 발상지 안내간판 뒤에 구세군 낙평영문이 보인다.
영덕 지품면 낙평리에 있는 구세군 낙평영문.
◆지품면, 3번의 만세운동
지품면에서는 원전장로교회 주명우 목사를 중심으로 3월19일 원전동 장날에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는 정순용, 김중명, 박기동, 김석이, 이석산 등 동료 기독교인 1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 만만세'라고 적은 종이 깃발을 흔들며 주재소로 향했다. 그는 "한국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죽어도 멈추지 말라" 그리고 "우리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독립운동을 지속할 것이다"라고 연설하다 체포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상고심을 신청하며 "대한민족이 하늘을 우러러 대한의 독립을 축원함이 어찌 징역형에 해당하리"라며 선고의 부당함을 따졌다. 그리고 "이는 하늘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리라. 신체는 강탈당했을지라도 내 마음은 절대로 이에 불복한다"라며 기백을 굽히지 않았다.
이어 3월21일에는 지품면 신안동에서 문의경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밤 9시, 문의경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종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를 따라 60여 명의 마을 사람들이 약 2시간 동안 동네를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으나 출동한 지품주재소 순사에게 검거되면서 만세운동은 막을 내렸다.
지품면 원정동 장날인 3월24일, 장터에서는 다시 한번 만세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동자는 윤악이와 신분금이다. 윤악이는 주명우 목사의 아내로 남편이 19일 시위 도중 체포되자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오늘 여기 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자" 신분금은 18일 영덕면 만세운동 때 체포되었던 김태을의 아내로 윤악이의 제의에 뜻을 함께하였다. 윤악이와 신분금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이끌어나갔다. 그러나 장날 시장은 일제에 의한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지 못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악이와 신분금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징역 8개월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지품면 3월24일 장날의 만세운동은 여성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전국 유일의 사례다. 이는 독립운동이 특정 계층이나 성별의 참여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 전체가 함께한 항일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주명우-윤악이 부부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들의 두 살 딸은 외할머니가 홀로 키웠으며 때때로 면회를 가 젖을 먹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훗날 주명우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윤악이는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부부는 대전 현충원에 함께 잠들어 있다. 김태을-신분금 부부는 2007년 함께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독립유공자로 동시에 상을 받는 최초의 부부로 기록됐다.
지품면에서는 3월19·21·24일, 3번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3월24일 만세운동은 여성이 만세시위를 주도한 전국 유일의 사례로, 독립운동이 특정 계층이나 성별의 참여에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 전체가 함께한 항일운동이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영덕군 지품면에 있는 3·18 만세운동발상지비.
영덕경찰서 병곡파출소.
◆가장 맹렬했던 영해·영덕의 만세운동
영덕에서의 마지막 만세운동은 4월4일 오후 1시30분 남정면 장사동 시장에서의 만세시위다.
장사동의 기독교도 및 청년유지 17명이 장날 시장으로 몰려가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일본 경찰에 의한 검거와 강제 해산으로 끝났다.
영덕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18일부터 4월4일까지 당시 9개 면 가운데 6개 면에서 8차례 일어났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5월 31일자에서 두 달 전 경북 영덕의 만세운동을 이같이 보도했다.
'경상북도에서 불령자(일제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의 망동 중에 가장 맹렬했던 영해, 영덕지방을 시찰하고 돌아온 경무부장의 말을 들은 즉 영해, 영덕지방의 망동소요는 대단히 맹렬했으나 요새는 모두 종식돼….'
1919년 12월 말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만세운동으로 경북에서 붙잡힌 사람은 모두 2천133명이다. 그중 영덕은 489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 가운데 185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주동자로 지목된 정규수는 징역 7년, 박의락, 서삼진 등은 징역 4년, 남효직, 남교문 등은 징역 3년, 김세영, 권태원, 김원발 등은 징역 2년, 김학이, 권영만 등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영덕의 독립 유공자는 228명이다. 군 단위로는 경북에서 가장 많다. 후에 정부는 그들의 공훈을 기려 애족장, 건국포장 등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영덕 각 지역에서 이어진 만세운동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주민들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역사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 지역 정체성과 공동체 정신을 상징하는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글=류혜숙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이지용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 전문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