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제철소 식구들
조용했던 방문 이유는
상인들의 시름 깊어져
그래도 이어간 발걸음
작지만 따뜻했던 동행
지난 22일 오전 박남식 포스코 포항제철소장(왼쪽)과 직원들이 저마다 구입한 물품을 손에 들고 시장 골목을 즐겁게 나서고 있다. 김기태기자
22일 오전, 포항 남구 대해불빛시장 골목에 주황색과 남색이 섞인 작업복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포항제철소 박남식 소장을 비롯한 직원들이었다. 좌판 앞에 쭈그려 앉아 있던 상인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박 소장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계란판과 채소 바구니가 놓인 좁은 통로 사이로 웃음소리가 퍼졌다. 뒤따르던 직원들의 양손에는 어느새 검은 봉지와 흰 비닐봉지가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매년 추석을 앞두고 이어온 장보기 행사였지만, 올해는 여느 해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이날 행사는 사전에 언론에 알려지지 않았다. 보통이라면 지역 상생 활동을 적극적으로 알렸을 법한 자리지만, 포항제철소는 이번만큼은 조용히 다녀가는 쪽을 택했다. 배경에는 최근 포스코 노사 관계가 있다. 포스코 노동조합은 지난 9일 1968년 창사 이래 첫 부분파업에 들어갔고, 임금교섭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장기화 우려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지역 경제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대외적으로 행사를 내세우기보다는, 시장에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조용히 상인들과 마주하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 제철소 측 설명이다.
박남소 포스코 포항제철소장과 직원들이 한 상점에서 물건을 구입하려 상점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기태기자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의 표정에는 반가움과 함께 걱정이 묻어났다. 파업 여파로 제철소 주변 상권부터 타격을 체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대해불빛시장만의 일이 아니다. 죽도시장을 비롯해 포항 전역의 전통시장들이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지역 경기 전반이 위축되는 분위기다. 포스코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협력 생태계와 출퇴근길을 따라 형성된 골목상권이 가장 먼저 흔들린다는 지역 경제계의 지적과도 맞닿아 있다. 한 상인은 "예년 같으면 대목 앞두고 활기가 돌 시기인데, 요즘은 다들 걱정이 앞선다"고 말했다.
22일 대해불빛시장을 찾은 박남식 포항제철소장이 상인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기태기자
그럼에도 제철소 직원들은 예정된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지역 경제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매년 해오던 장보기를 올해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달걀, 나물, 젓갈 등 명절 상차림에 필요한 물품들이 직원들 손에 담겼다. 시장통을 걷는 내내 상인들과 짧은 안부 인사가 오갔고, 몇몇은 서로를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맞잡기도 했다. 화려한 현수막이나 공식 행사 절차 없이, 각자 필요한 것을 사고 인사를 나누는 소박한 방문이었다. 요란하지 않았던 만큼, 오가는 대화에는 오히려 더 진솔한 마음이 담겼다는 것이 현장을 지켜본 이들의 전언이다.
포스코와 포항 지역경제는 반세기 넘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회사가 어려우면 지역이 함께 휘청이고, 지역이 흔들리면 회사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이번 노사 국면에서 다시 한번 확인하는 분위기다. 대해불빛시장을 다녀간 이날의 장보기는 결코 큰 규모의 행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려운 시기일수록 요란한 홍보보다 조용한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걸음이기도 했다. 노사 교섭의 향방이 여전히 안갯속인 가운데, 제철소 직원들이 남기고 간 온기가 상인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기를 바라본다.
김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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