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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김천역 창고 속 20년, 어둠에 갇혔던 보물들

2026-09-25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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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미술전 출품 후 길 잃은 불상 19구
역장들의 골칫거리에서 경북도 문화유산으로

김천 고성산 자락 주택가에 위치한 개운사 전경.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김천 고성산 자락 주택가에 위치한 개운사 전경.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경북 김천 시가지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고성산(482m) 자락의 개운사(開雲寺). 1918년 포교당으로 창건된 개운사는 도심 가까이 있는 사찰이어서 예부터 찾는 이가 많았지만, 개운사 부처를 만나는 일이 그리 수월하지만은 않았을 듯하다. 지금이야 자동차를 타고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지척에 있는 개운사에 쉽사리 닿을 수 있지만, 예전엔 시내 어느 곳에서나 가파른 오르막(노실고개)을 한참 걸어서 오르는 공력을 쏟아야만 다다를 수 있는 도량이었다. 사람들은 개운사 가는 길의 오르막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불심을 더욱 두터이 했을 터이다. 경북도 문화유산자료(제440호)인 '김천 개운사 목조지장보살좌상(木造地藏菩薩坐像) 및 시왕상(十王像)'을 보러 간 날, 어느덧 가을은 고성산에도 내려앉고 있었다.


김천 개운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은 6·25전쟁 이전까지 초대형 가람으로 자리했던 김천시 증산면 쌍계사(雙溪寺)가 본향이다. 1685년(숙종 11년) 제작돼 쌍계사 명부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목조불상군(佛像群·총 19구)이 개운사에 안착하기까지의 기나긴 고행은 일제강점기인 1943년 시작됐다.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쌍계사 지장보살좌상을 비롯한 목조불상군을 '고미술품 전시회'에 출품하기로 했다. 이때 불상군은 쌍계사에서 반출돼 서울로 옮겨졌으나, 전시회가 열렸던 정확한 시점에 대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다만 전시기간 중에 광복을 맞았고, 이 와중에 불상군이 처음엔 서울역에, 이후엔 김천역 화물창고에 보관돼 있었던 사실에 비춰볼 때, 불상들은 서울로 옮겨졌다가 김천역까지 되돌아왔다.


김천 개운사로 이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김천 개운사로 이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그러나 광복 직후인 당시 형편으로는 오지인 증산면 쌍계사까지 19구에 달하는 불상군을 옮겨갈 마땅한 운송수단을 구할 수 없는 등의 사정으로 김천역 화물창고에 임시보관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당시는 쌍계사 형편도 크게 위축된 상황이었다. 증산면 한 주민의 기억에 의하면 당시 쌍계사엔 스님이 많지 않았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일제강점기 말엽의 불교탄압 영향으로 스님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일 것"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이런저런 문제로 불상군의 쌍계사 복귀는 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일본인들이 고미술품전시회 출품을 명목으로 불상군을 김천역으로 옮겼으나, 광복이 되면서 프로젝트는 중단되고 그대로 김천역에 방치됐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송 국장은 "미군정이 시작된 상황에서 불상군이 김천으로 되돌아왔다는 게 '다수설'이다. 당시 상황에선 불상군을 운반할 우마차조차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가운데 6·25전쟁이 발발했고, 쌍계사는 인근 수도산에 진을 친 파르티잔의 방화로 1951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따라서 갈 곳을 잃은 쌍계사 목조불상군의 기한 없는 기다림이 시작됐고, 김천역도 자신들이 임의로 처리할 수 없는 골칫거리를 떠안게 됐다. 송 국장은 "당시 김천역 입장에선 무작정 보관하고 있을 수도 없었을 테고, 마땅히 보낼 곳도 없는 상황인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선배 향토사학가로부터 '부임하는 역장마다 화물창고에 보관된 불상군 처리 문제를 두고 고심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이처럼 6·25전쟁 종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 이후 부임한 김천역장들은 모두 불상군 처리를 두고 고심했지만, 이들의 고심은 20여년이 지난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해소된다. 송 국장은 "화물창고에 보관된 불상군 처리에 골몰하던 김천역은 시내에 소재한 개운사가 역에서 거리도 가까운 등 이운하기에 적지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후 개운사와 긴밀한 협의를 통해 1970년대 초반에 불상군 전체를 이운했다"고 설명했다. 20여년 동안 어둠 속에 방치된 불상군이 개운사를 통해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일제의 반출 시도가 없었거나 광복 직후 본향인 쌍계사로 되돌아갔었더라면, 지장보살좌상 등 불상군도 쌍계사와 함께 전화(戰火)를 입어 영원히 사라졌을 것이라는 역설도 존재한다.


석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이 봉안된 김천 개운사 명부전.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석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이 봉안된 김천 개운사 명부전. 박광제 사진작가 제공

'김천 개운사 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 보존처리 보고서'는 "존상들은 조각의 솜씨와 구조적인 목재 결구방식, 베바르기 수법, 채색기법, 복장내용 등을 볼 때 기술적인 면이나, 예술성이 매우 뛰어난 수작"이라고 평가했다. 박광제 사진작가(김천향토사연구회원)는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잇단 전란으로 파괴된 사찰을 재건하고 수많은 불상과 불화가 대대적으로 조성되던 시기"라며 "이때 제작된 개운사 목조불상군은 조각적 완성도가 매우 높아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김천 개운사 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사후세계의 심판과 구원 과정을 나눠 담당하는 도명존자(좌협시), 무독귀왕(우협시), 진광왕 등 명부의 10대 왕(시왕), 명부의 판관과 녹사(4구), 명부의 수호신(2구)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인월 김천 개운사 주지스님(직지사 총무국장 겸임)은 "지장보살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은 지옥에 떨어진 중생을 구하는 것이며, '지옥이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으며, 모든 중생을 구도하고 나서야 보리를 이루리라'는 유명한 서원을 세웠다"며 "스스로 부처가 될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성불을 미루고 지옥 입구에 머무는 보살이며, 혹시 악도(惡道·악업을 지어서 죽은 뒤에 가야 하는 괴로움의 세계)에 떨어지더라도 구해주실 것을 기대하게 하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목조지장보살좌상 등을) 처음엔 경내 '팔각전'에 모셨으나, 지금은 1980년대에 지은 '명부전'에 모시고 있다"고 안내했다. 개운사는 창건된 이래 동화사의 포교당으로, 1926년 이후엔 김용사의 포교당으로, 직지사 말사로 편입된 이후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본사 직지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교당으로 자리하는 등 김천을 중심으로 신도확장에 주력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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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

김천의 오늘과 김천 사람들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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