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
◆숨소리/김두한 지음/월간문학/122쪽
김두한 시인(한국현대시인협회 부이사장)이 시집 '숨소리'를 펴냈다. 이 시집은 65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숨소리라는 하나의 제목 아래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를 취한다. 이는 파편화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결국 모든 존재는 보이지 않는 탯줄('숨소리 60')로 연결되어 있다는 총체적 세계관을 구현한다.
양왕용 부산대 명예교수는 이 시들이 식물적 상상력과 사물의 존재 의미 및 인공지능 시대의 상상력과 현실 인식의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 가운데서 인공지능 시대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의 예로 그는 '숨소리 22'를 든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압축된 폴더를 연다/ 그 안엔 조각난 이미지들/ 그리고 우리jpg라는 파일 하나,/ 열면 오류가 뜬다/ 나는 그 오류 창의 불빛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본다/ 사랑은 완벽한 형식보다/ 깨진 픽셀 속에서 더 선명하다/ 나는 깨진 조각들을 붙인다/ 이름 없는 감정들이 복원된다/ 기억은 하나의 그림이 되어 돌아온다/ 사진 속의 우리는 아직 웃고 있다/ 세상은 바뀌었지만/ 그 미소는 여전히 최신 버전이다/ 나는 그 웃음을 복제해 저장한다/ 읽기전용으로/ 이제 아무도 수정할 수 없다/ 눈이 아프다/ 수정되지 않는 행복,/ 그것이 가장 고요한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 가장 혁신적인 문학적 성취는 '디지털 실존주의'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은 한국 현대시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생명 서정의 전통을 계승하는 동시에, 21세기 디지털 문명과 동시대적 정치·사회적 위기를 유기적으로 통합해냈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흔다섯 강물이 주홍빛으로 물들다
◆아흔다섯 강물이 주홍빛으로 물들다/이행우 지음/북랜드/143쪽
이행우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아흔다섯 강물이 주홍빛으로 물들다'(라온현대시인선 21)를 펴냈다. 모두 4부 64편의 작품을 수록한 이번 시집은 부모에 대한 사랑과 가족애, 그리고 고향 청도의 자연과 삶의 기억을 서정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시집의 중심에는 아흔다섯 살의 어머니가 있다. 2018년 갑작스러운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의 병상 곁에서 보낸 시간은 시인에게 삶과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돌아보게 한 계기가 됐다. 병실의 침묵과 긴 기다림, 자식으로서의 간절한 마음은 시편 곳곳에 스며 있다.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감정적으로 과장하기보다 절제된 언어와 담담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모습과 함께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부모의 희생과 사랑을 되새긴다. 개인적인 가족사를 바탕으로 하지만, 그 기억은 한 사람의 어머니를 넘어 우리 모두가 지닌 부모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으로 확장된다.
시인의 고향 청도 역시 시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감나무와 능금밭, 동창천과 들녘, 산과 마을의 풍경 등 익숙한 고향의 모습이 시인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자연은 단순한 배경에 머물지 않고 시인의 삶과 정서를 형성해 온 정신적 고향으로 자리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고향의 풍경이 겹쳐지면서 시집에는 따뜻하면서도 아련한 정서가 흐른다.
빠르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부모와 가족, 그리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 이번 시집이 건네는 조용한 메시지다.
도광의 시인은 추천사에서 "가슴이 따뜻한 시인은 고향과 어머니를 시의 종착지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며 "그의 시는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위로를 품고 있다"고 평했다.
모두가 하늘입니다
◆모두가 하늘입니다/권복술 지음/만인사/98쪽
지구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한순간에 무너져 녹아내리고, 그 산에 의지해 살아가던 수많은 생명과 삶의 흔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면 인간은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히말라야는 수많은 생명에게 하나의 하늘이었다. 하늘이 없이는 어떤 생명도 단 한순간조차 살아갈 수 없다.
갓난아기에게 어머니는 하늘이고,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 의사는 하늘이다.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물 한 방울이 하늘이며, 풀 한 포기와 돌멩이 하나,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세상의 모든 존재가 저마다의 하늘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나에게 하늘은 무엇일까? 어쩌면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가 바로 나의 하늘인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가에게 하늘이 될 수 있고, 누군가 역시 나에게 하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은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생명과 존재의 의미를 깊이 성찰한다. 갓난아기에게 어머니가 하늘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방울이 하늘이라는 깨달음은 인간과 자연, 나와 타자가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공동의 생명체임을 일깨운다. 결국 '모두가 하늘입니다'는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소중한 하늘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며, 함께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 서로를 살리고 보듬는 '극락세계'를 향한 염원을 담아낸 시집이라 할 수 있다.
박진형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존재의 근원에 닿고자 하는 기원을 시세계 속에 가감 없이 펼쳐보인다"고 평했다.
경북 칠곡 출신인 시인은 1996년 '한맥문학' 시 신인상, 1997년 '문예한국'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이름없는 풀꽃' '새벽에 깨어 황혼을 칠하다', 시선집 '모두가 하늘이다', 수필집 '세월의 굴레' 등이 있다.
씨앗은 멀리 날고 싶다
◆씨앗은 멀리 날고 싶다/정영웅 지음/북랜드/120쪽
동화작가 정영웅이 동화집 '씨앗은 멀리 날고 싶다'를 펴냈다. 1부와 2부에 모두 22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1부는 학산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이고, 2부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본 이야기다.
1부에 묶은 열한 편은 지은이가 자주 찾는 학산에서 만난 자연과 사람, 사소한 풍경에서 출발한다. 학산에서 발견한 것들은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무대가 된다. 하얀 민들레꽃, 고양이 쉼터, 죽은 이들의 마을, 집 나간 토끼, 쉼터가 되고 싶은 의자까지 평범해 보이는 대상들이 작가의 상상력을 만나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거듭난다.
1부의 마지막 작품 '학산 손바닥 이야기'에서는 다섯째 이야기 '학산 산불 현장'부터 이야기의 형식이 기록문으로 바뀐다. 이는 학산을 단순한 동화의 배경으로 소비하기보다, 실제 존재하는 자연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으로 읽힌다.
2부는 '세상 이야기'다. 지은이는 어린이들을 보듬고 지켜주던 울타리가 하나둘 사라지는 현실을 바라본다. 이야기 속 할머니와 증조할머니, 완행버스 기사 아저씨는 가정과 이웃, 사회라는 울타리를 상징하는 존재들이다. 늑대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생태계의 문제를 짚고, '은실이의 눈'에서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 '목줄이 덫이 되고 덫이 화분이 된 이야기'는 이웃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통해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정영웅은 능란한 이야기꾼이다. 글줄을 딛는 발걸음이 가볍고 발랄하다. 학산의 작은 풍경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어느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 넓어진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그 이야기의 길에 자연스럽게 발을 들여놓게 된다.
정리=김형범 대구문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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