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판화부터 대형 설치까지 작품 12점 한자리에
20여 년간 이어온 작업 해체하며 새로운 변화 시도
지난 8일 오후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에서 만난 부지현 작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왜 작업을 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며 "그런 지금의 상태마저 작업의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권혁준기자
바다를 누비던 낡은 배는 조각조각 잘려 나갔고, 작품 속에 감춰져 있던 모터와 전선은 모습을 드러냈다. 바닥에 펼쳐진 3t의 소금은 정지된 바다를 떠올리게 하고, 어둠 속에서 진자운동을 하는 집어등은 끊임없이 물을 떨어뜨린다.
설치미술가 부지현(47)의 개인전 '부지현의 코스모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 오는 12월19일까지 대구보건대 인당뮤지엄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2000년대 초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부지현의 작업세계를 조망하는 자리다. 미술관 로비와 제1~5전시실에 대형 설치작품 6점과 판화 6점 등 총 12점을 선보인다.
부지현 작. 권혁준기자
김정 인당뮤지엄 관장은 "지금 현장에서 치열하게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작가에게 디딤돌이 되고 싶었다"며 "이번 전시는 지난 20년의 성과를 정리하는 회고전이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라고 말했다.
지난 8일 인당뮤지엄에서 만난 부 작가는 이번 전시가 자신에게도 낯선 도전이었다고 털어놨다. 여러 전시실의 작품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야 했던 만큼 구상이 수없이 바뀌었고, 완성한 작품을 사용하지 않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수많은 전시를 하면서 공간이 정해지면 어떤 작품을 설치할지 명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왜 작업을 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도 스스로에게 던졌다. 부 작가는 "지난 작업들을 돌아보며 답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며 "그런 지금의 상태마저 작업의 과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전시의 시작점인 로비의 '배(The Boat)'는 실제 폐선을 뱃머리와 조각 100여 개로 해체한 작품이다. 부 작가는 "하나의 덩어리였을 때 보지 못했던 질감과 이미지가 드러났다"며 "작품의 작은 오차까지 통제하던 집착을 내려놓자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부지현 작. 권혁준기자
제1전시실의 '시간의 표면(Solid Sea)'은 3t의 소금으로 정지된 바다를 표현했다. 작가는 소금을 자신의 감정과 기억이 응고된 상태로 해석했다. 제2전시실에는 지난 20여 년간 작품 속에 감춰왔던 모터와 전선, 전기회로 등을 꺼내 놓았다. 철저히 통제하고 숨겨왔던 작업의 이면을 드러낸 것이다.
부지현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소재는 집어등이다. 제주에서 성장한 그는 2003년 태풍 매미가 지나간 무렵 집어등을 가까이에서 접한 뒤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부들과 교류하며 집어등에 대한 시선도 달라졌다. 그는 "우리에게 밤바다는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현장이자 노동의 공간이었다"고 말했다.
집어등을 통해 빛보다 어둠을 탐구해 온 그의 관심은 점차 빛의 성질과 공간으로 확장됐다. '잠정적 형상(Provisional Form)'은 프리즘과 광학필터로 변화하는 빛을 보여주고, '빛의 숨결(Luminous Breath)'은 초기 판화와 집어등 설치작품으로 20년의 시간을 연결한다. 마지막 전시실의 'Where is it going?'은 진자운동하는 집어등에서 떨어지는 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파장과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부 작가는 관람객에게 작품 앞에서 잠시 멈추는 시간을 권했다. 그는 "요즘은 문화생활조차 무언가를 배우고 얻어가야 하는 일이 된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런 부담을 내려놓고 잠깐 멍하니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권혁준
영남일보 권혁준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