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순 전 경북대학교 초빙교수
오늘날 우리는 진실이 소멸한 시대, 이른바 '탈진실(Post-truth)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Fact)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해석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다. 내가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나 입맛에 맞지 않으면 팩트마저 정교하게 재단하고 가공해 버린다. 문제는 이러한 불신의 풍토가 우리 사회의 상식과 균형감을 급속도로 무너뜨리고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파장이 큰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했을 때, 팩트가 투명하게 공개되지 못하고 지연되거나 축소되면서 의혹과 불만이 증폭되는 일이 종종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작동해야 할 원칙은 사실을 신속히 밝히고 그에 따른 정직한 조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방어 기제부터 작동한다. 왜 우리 사회는 정직한 고백과 수습 대신 은폐의 유혹에 빠져드는 것일까.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문제를 대하는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 사고나 위기가 터졌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차분히 진단하고 구조적 개선을 모색하기보다 즉각적으로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며 책임자를 지목해 희생양으로 삼는 '마녀사냥식 징벌'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거대한 참사나 위기의 순간에도 시스템의 결함이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어느 하나를 정조준해 모든 책임을 덮어씌우고 단죄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식은 업무에 종사하는 실무자와 조직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진실을 투명하게 드러냈을 때 감당해야 할 무차별적 인격 살인과 사회적 린치를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든 책임을 면하고자 사실을 숨기고 축소하려는 왜곡된 방어벽을 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팩트를 감추게 만드는 데에는 팩트 앞에서 실수와 오류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의 단죄 문화도 일정 부분 작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은 우리가 모두 짊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팩트는 과연 언제,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팩트는 자의적 입맛에 따라 가려지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해석'은 팩트를 덮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의 무게를 온전히 받아들인 뒤 왜 이런 비극과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성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어느 한 사람의 일탈이나 무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제도적 허점과 관행, 잘못된 의사결정 구조, 그리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온 작은 문제들이 서로 결합해 하나의 사고로 귀결된다. 그럼에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내 탓'은 지우고 타인의 탓만을 외치며 누군가를 단두대에 세운다면, 우리는 정작 문제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 'Blameless Post-mortem(블레임리스 포스트모템)'이라는 사고 대응 원칙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 '누가 잘못했는가'를 먼저 묻기보다 '왜 이런 사고가 발생할 수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방식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항공·의료 등 고위험 산업에서 발전한 시스템 중심의 사고 조사 문화와 맞닿아 있으며, 이후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도 널리 받아들여졌다. 특히 쇼핑플랫폼 앳시(Etsy)의 존 올스포가 2012년 'Blameless Post-mortem(비난 없는 사후분석)'을 명확하게 소개하면서 소프트웨어 업계에서 널리 알려졌고, 이후 Google의 SRE(Site Reliability Engineering) 문화에서도 중요한 장애 대응 원칙으로 자리 잡았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을 정확하게 밝히고, 살펴보자는 것이다. 실수를 학습으로 전환하고,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실패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문제도 예방하는 것이다. 결국은 공동체에 더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방식이다.
사실을 두려움 없이 고백할 수 있는 투명한 토양, 잘못을 책임지는 용기와 윤리의식, 그리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이성과 합리,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보다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사회가 공정하고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어야 책임지는 용기가 생길 수 있다. 진실을 말해도 매장되지 않는 사회, 실수를 인정해도 개선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사회라야 모두가 바라는 팩트를 건져 올릴 수 있다. 우리는 팩트를 건져 올릴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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