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덕률 전 대구대 총장
1936년 10월20일, 꼭 90년 전 오늘이었다.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이 세상을 떠났다. 헬렌 켈러의 이름은 널리 기억되지만 설리번의 이름은 자주 불리지 않는다. 우리는 한 사람의 눈부신 성취는 기념하면서도 그를 키운 교육의 힘과 스승의 수고는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혹시 우리 사회가 교육을 대하는 태도도 그런 것은 아닐까?
자주 인용되는 헬렌 켈러의 성취에 대해서도 생각거리가 적지 않다. 시청각장애를 지니고도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그녀의 외면적 성취에 먼저 주목해온 것은 아닌지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성취는 학위나 명성에만 있지 않다. 혹독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세상과 소통할 언어를 찾아낸 뒤, 삶과 사랑, 인간 존엄에 관한 깊은 통찰을 자신의 언어로 남겼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교육은 사람을 만드는 일이다
설리번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즉, 그녀가 보여준 것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한 아이에게 말을 가르친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학생의 상태를 읽고 끝까지 길을 찾은 교육적 판단과 책임감이었다. 특수교육의 기술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 안에 갇혀 있던 아이를 성찰할 줄 알고 세계를 이해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키워낸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교육은 너무 오랫동안 기능과 외면적 성과에 치우쳐 왔다. 개인에게는 성공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 사회적으로는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도구로서의 교육을 주로 강조해 온 것이다. SKY나 의치한약수 합격자로 고교의 서열을 매기고 취업률로 대학을 평가하는 풍토가 대표적이다. 자녀의 성적에만 매달린 일부 학부모의 반교육적 민원도 대부분 교육의 경제적 성과에 대한 과도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 교육의 본질이라 할 '사람을 만드는 일', '인격을 도야하는 일',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기르는 일'은 늘 뒤로 밀려나 있었다.
교육이 본질과 기본에서 멀어지고 기능과 성과주의에 매몰될 때 가장 피해를 보는 당사자는 학생이고 가장 먼저 소진되는 이는 교사다. 교실에서는 혐오와 조롱이 놀이처럼 소비되고, 4세 고시와 학교폭력은 이제 뉴스거리도 아니다. 자살이 청소년 사망의 주요 원인으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다. 자괴감과 회의감, 무력감에 빠져 정년 전에 제자와 교실을 떠나는 교사들도 적지 않다.
교육의 두 주체인 학생과 교사가 함께 무너지고 있는 학교 현장이 성할 리 없다. 공교육은 신뢰를 잃은 지 오래고 사교육은 어떤 대책을 내놓아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학교 교육이 대학입시와 취업 준비에 종속된 것, 대학에서 기초학문이 고사되고 있는 것, 비수도권 대학들이 생존 위기에 내몰린 것도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는 대학입시를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고교를 중퇴하는 일마저 벌어지고 있다.
교육의 문제는 학생과 교사가 고통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곧바로 사회 문제들을 잉태하거나 강화하기 마련이다. 높은 학력을 지니고도 자기 성찰과 공공성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전문가들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쉽게 보게 되는 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다. 정치와 언론, 종교를 비롯한 공적 영역 곳곳에서 거짓과 탐욕, 독선과 내로남불을 쉽게 보게 된 것 역시 교육의 실패와 무관하지 않다.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서 과도한 경쟁이 일상화된 데에도 교육의 책임이 작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교육의 본질과 교사의 역할을 무엇으로 볼 것인가에 있다. 존 듀이는 '교육은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라고 했다. 교육은 단지 더 좋은 대학과 직장을 얻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인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오래 기억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 영화는 교육이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을 깨우고 자기 목소리를 찾게 하는 일임을 상기시켜 준다.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 이상 기능과 실용 위주의 낡은 교육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했다는 사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교육의 본질과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공교육을 세우는 지름길이며, 극단적 경쟁의 장이 돼버린 우리 사회를 다시 건강하게 돌려세우는 확실한 방법이다. 학교를 지옥이 아니게 하고 교사들이 다시 사명감과 열정을 갖게 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마침 AI 대전환의 시대를 맞아 교육의 역할을 다시 묻는 논의가 일고 있는 것도 교육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화해 주고 있다. 이미 정해진 답을 암기하는 교육보다 질문하고 성찰하는 힘, 그리고 인문학이 더 중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할 줄 알고 자신을 성찰할 줄 아는 민주시민으로 키우는 일은 지식을 전수하고 성적을 올리는 일보다 훨씬 어렵고 더 높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교사의 고유 과업이다. 설리번의 위대함도 교육적 판단의 힘만이 아니라, 제자 헬렌 켈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책임감과 한 인간 전체를 품은 교육 태도에 있었다. 그녀는 학생의 상태를 읽고 정해진 길을 반복하지 않으며, 새로운 방식을 찾고 끝까지 책임졌다. 거기에는 열정과 헌신만이 아니라 교사로서의 자율성도 있었다. 교사가 학생을 독립된 주체로 이해하고 전문가로서의 판단 아래 책임지고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교육은 살아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해 온 '교육입국'이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정립해야 한다. 교육입국은 실력 있는 인재를 많이 길러 국가경쟁력을 키우고 경제∙군사 강국으로 세우자는 것을 가리켜서는 안 된다. 세계 최빈국으로 생존과 번영의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던 과거를 돌아보면 그런 교육관과 국가관이 필요했던 사정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와 함께, 아니 그에 앞서 인격을 세우고 건강한 민주시민으로 길러 정의로운 민주주의 선진국, 품격 있는 문화강국을 세우는 일로 교육입국의 뜻을 다시 해석해야 한다.
설리번이 세상을 떠난 지 90년이 되는 오늘, 그녀가 남긴 질문은 오히려 더 또렷하다. 사람을 만드는 일보다 성과를 앞세운 사회가 어디로 기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길을 되돌리는 출발점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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