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261022026545492

[서상희의 쉰셔널지오그래픽] 집밥의 계절

2026-10-23 06:00
  • 가
  • 가
  • 가
  • 가
  • 가
보길도의 해넘이. 누군가 마음으로 차려주는 집밥이 간절히 먹고 싶었고, 그 섬에 그런 할머니 집밥이 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배에 올랐다.

보길도의 해넘이. 누군가 마음으로 차려주는 집밥이 간절히 먹고 싶었고, 그 섬에 그런 할머니 집밥이 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배에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시월은 참 답이 없는 계절이다. 온 들녘이 풍요로워서 상대적으로 나의 빈곤이 더 선명히 드러난다고 할까.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족 내에 참았던 서운함이 터져 나왔던 한 장면이 있었고, 늘 큰 산 같았던 선배가 홀쭉해진 몸으로 "나 이제 진짜 늙었나 봐" 하고 읊조리던 장면이 있었다. 오랜 친구는 고가 아파트에 입주했다며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주차장 출입 등록부터 벨 누르는 법, 문을 나서면 엘리베이터가 저절로 올라오는 첨단 기능, 멋진 산책로와 조경을 보여주었다. 발판을 누르면 수돗물이 나오는 주방 앞에서는 학교 앞 떡볶이집에 새 메뉴가 나오면 안달하던 여고생들처럼 함께 탄성을 지르고 깔깔댔다.


웃기고 울리는 세상의 풍경들이 지나갔지만, 나는 결코 기쁠 수 없었다. 뭐라 할까, 그 다양한 파노라마 어디에서도 채울 수 없는 허기 때문이었을까.


보길도로 향했다. 윤선도의 섬으로만 알고 있었고, 완도에서 배를 타고 들어간다는 것만 알았다. 온라인 예약이 되지 않아 화흥포 농협에 전화했더니 직원분이 친절한 남도 사투리로 답했다.


"사람이 많아 못 타는 경우는 없응께 그냥 오시면 되어요~."


보길도를 택한 이유는 딱 하나, 집밥 때문이었다. 누군가 마음으로 차려주는 집밥이 간절히 먹고 싶었고, 그 섬에 그런 할머니 집밥이 있다는 소문 하나만 듣고 배에 올랐다. 타지에서 불현듯 집밥이 떠오를 때는 보통 이유가 있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거나, 몸이 아프거나, 영혼의 허기를 이기지 못할 때다.


보길도 민박집의 밥상. 12첩 반찬에 쫄깃한 아귀살을 넣고 자글자글 끓여낸 매운탕이 저녁상으로 나왔다.

보길도 민박집의 밥상. 12첩 반찬에 쫄깃한 아귀살을 넣고 자글자글 끓여낸 매운탕이 저녁상으로 나왔다.

숙박을 해야만 밥을 차려주는 그 집에는 노부부가 살고 계셨다. 이 섬에서 나고 자라 결혼까지 하셨다는 두 분. 아들 셋은 모두 서울로 떠났고, 한창때는 양식업을 꽤 하셨다고 한다. 섬이라고 소득이 낮을 거라 짐작하면 안 된다. 동네 주민 말처럼 "저 앞밭이 좋아 돈 아쉬운 줄은 모른다"는 곳이다. 여기서 '밭'이란 흙밭이 아니라 물밭, 즉 바다를 뜻한다.


이 민박집은 원래 식당이 아니었다. 어촌계장님이 손님들을 자꾸 데려와 "밥 좀 내어놓으라" 떼쓰는 바람에 어쩌다 밥 주는 민박집이 되었단다. 낡은 꽃무늬가 그려진 큰 양은쟁반 위에 상다리가 부러질 듯 반찬이 가득하다. 풀치, 멸치, 전복, 파래, 고동, 톳 등 12첩 반찬에 쫄깃한 아귀살을 넣고 자글자글 끓여낸 매운탕이 저녁상으로 나왔다. 고봉으로 꾹꾹 눌러 담은 밥은 여태 본 적 없는 양이다. 덜어내고 싶었지만 권하는 노부부의 눈길이 미안해 푸욱 한술 떴다. 아, 밥이 참으로 달고 맛있다. 한식은 반찬보다 밥이 맛있어야 기본 입맛이 살아나는데 딱 그러했다. 밥이 참 맛있다고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가 무심한 어투로 비법을 풀어놓으신다.


"나는 전기밥솥 못혀. 딸깍 누르면 된다는데 그걸 못 배워서 아직까지 솥밥을 하지."


"반찬도 짜지 않고 딱 좋아요."


"우리 며느리도 그러대. 어머니 입맛이 아직 슴슴해서 오래 사시겠다고."


내가 사 간 막걸리를 한 잔씩 올리자 드디어 입담이 터지셨다. 이른바 유명인 뒷담화다. 밥집으로 소문나 별별 사람이 다 왔는데, 누구는 점잖고 누구는 쪼까 건방지더라며 안타까워하셨다.


"아니, 큰 갈치를 어디서 사와서 거기다 설탕을 막 뿌려가며 자기가 직접 요리를 하겠다는 거여. 아주 속상해 죽는 줄 알았어. 그렇게 하면 맛이 다 달아나지. 그리고 이 완도 구석에 갈치가 어디 있당가. 멸치나 잡는 동네에서."


완도 바닷가와 부속섬인 예작도 모습.

완도 바닷가와 부속섬인 예작도 모습.

거나하게 먹고 방으로 올라오자 밤 8시, 온 동네 불이 꺼졌다. 섬 전체가 자야 할 시간이었다. 동네 고양이들까지 자러 들어가는 고요 속에서 오랜만에 12시간을 푹 잤다. 아침 7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 차려놨어요."


갖은 야채를 다져 넣은 전복죽에 해초 반찬이 차려졌다. 죽 한 그릇을 비우고 일어나려는데, 할머니가 슬그머니 커다란 양푼을 가져오신다.


"끓이다 보니 많이 끓였네. 이거 도시락통에 담아줄 테니, 오늘 바닷가 한 바퀴 돌다가 출출할 때 드셔. 나가면 또 생각날 거여. 전에 어떤 손님은 저쪽 전망대에 앉아 이 전복죽을 먹는데 너무 맛있어 죽겠다고 전화까지 왔당께. 영감이랑 나랑 그 소리가 우스워서 한참을 웃었어. 원래 죽은 약간 식어야 더 맛있는 법이잖어?"


전복죽 도시락을 가방에 넣고 남도 바닷길을 걷는 여행을 상상해 보시라. 그 온기가 허리에 닿을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고 따뜻해지는지.


타지에서도 굳이 집밥을 찾는 이유는 단순하다. 계산이 아닌 '마음'이 들어간 밥을 먹어야 사람의 허기가 제대로 채워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료를 아껴 원가를 계산하며 만든 음식은 당장 입에는 달콤할지언정, 지친 위장과 영혼을 위로하기엔 어딘가 부족하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스한 밥정(情)은 몸에 깊이 새겨지는 또 하나의 각인이다. 아무리 먼 길을 헤매던 탕아라도 어머니의 집밥이 그리워지면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새벽별을 보다가 찍은 민박집 모습. 집 뒤로 오리온 자리가 선명했다.

새벽별을 보다가 찍은 민박집 모습. 집 뒤로 오리온 자리가 선명했다.

202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앤 카슨의 대표작 '남편의 아름다움'에는 "아름다움은 진실이고, 진실은 아름다움이다"라는 존 키츠의 시가 나온다. 진정성이 있어야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으며, 거짓과 가식이 없는 가장 투박하고 상처받기 쉬운 진실만이 우리 삶을 참되게 만든다는 뜻이다.


부대끼는 세상 속에서 헛헛했던 내 시월의 빈곤은 그렇게 가장 투박하고 진실한 밥 한 끼에 의해 다독여지고 있었다. 보길도를 떠나오던 새벽, 까만 하늘엔 별이 빛났다. 삼태성, 즉 오리온 자리가 나란히 선명했는데, 그 별빛이 출발했던 곳에서 보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그 먼 곳의 내가 지금의 내게 답을 했다.


"별일 아닌 것에 아프거나 휘청대지 말 것, 별빛을 쏘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로 걸어갈 것, 바다도 걷다 보면 언젠가 별빛을 따라 길이 날지니, 이 가을 티 내지 말고 밥처럼 기본만 다할 것, 없는 듯 있는 듯 혼자서라도 행복하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