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가 무대 직접 답사…현실 풍경에 상상 더해
고전 회화 기법에 새로운 표현 방식 접목
오는 12월2일까지 021갤러리에서 개인전 'Palimpsest : 겹쳐 쓰기'를 여는 진민욱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산책'이라는 개인적 체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답사'를 통해 문학 속 무대를 채집했다. 권혁준기자
춘향을 구하러 가던 이몽룡이 지나갔을 법한 길을 오늘날 찾아가면 어떤 풍경을 마주하게 될까.
동아시아 고전 회화를 재해석해 온 진민욱 작가의 개인전 'Palimpsest : 겹쳐 쓰기'가 오는 12월2일까지 021갤러리에서 열린다.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는 글을 지우고 다시 쓰면서 이전의 흔적과 새 기록이 겹쳐 남는 것을 뜻한다. 작가는 이를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얻은 풍경, 기억과 상상을 결합하는 작업에 빗댔다.
진 작가는 2017년부터 '걸으면서 보기'를 통해 일상의 풍경을 수집해 왔다. 나무와 작업실 주변 등 개인적 경험에 주목했던 작업은 시 필사를 거치며 다른 시대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으로 확장됐다.
이번 신작은 '산책'이라는 개인적 체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작가는 고전 문학의 무대를 찾아가 오늘의 풍경을 채집했다. '춘향가'를 소재로 한 작업에서는 남원 광한루 일대와 이몽룡이 지나갔을 법한 경로를 추정해 이동했다.
진민욱 작. 021갤러리 제공
최근 021갤러리에서 만난 진 작가는 "판소리 속에서는 굉장히 파란만장한 여정인데 실제로 가보니 계속 초록색 농촌 풍경과 주유소, 편의점만 등장했다"며 "그런 괴리감에서 느껴지는 여러 감각들이 서로 직조하듯 연결되는 것 같아 작업으로 풀어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품에는 축사와 논밭, 현대 시설물에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을 암시하는 꾀꼬리와 둥지가 함께 등장한다. 렌터카 번호판과 주웠던 솔방울, 작가의 소지품도 소재가 됐다. 과거의 이야기와 작가가 경험한 현재가 한 화면에서 만난다.
'세개의 별'은 현실과 상상을 결합했다. 낮에 촬영한 남원 광한루 풍경에 물에 비친 별 세 개를 상상해 화면 아래쪽에 배치했다.
진 작가는 "광한루를 처음 찾았을 때는 잘 지어진 정자가 있고 날씨가 좋은, 생각보다 조금 지루한 공간처럼 느껴졌다"며 "그런데 장소의 의미를 조사하고 판소리 속 이야기를 다시 접하니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말했다.
진민욱 작. 021갤러리 제공
소재는 동양 고전에 한정되지 않는다.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곡(The Prelude)'과 고대 그리스 시인 사포의 시도 등장한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다정한 서술자'를 통해 문학적 상상력이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방식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사람들이 자연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다르게 풀어내는지 흥미로웠다"며 "몇백 년 전에 쓰인 고전 시를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풍경으로 재해석하면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이번에는 이전에 지웠던 제작 흔적도 남겼다. 마스킹테이프로 한 칸씩 색을 쌓으며 생긴 분할선과 격자, 붓질의 흔적을 드러내고 일부는 여백으로 뒀다.
진 작가는 "예전에는 작업 과정에서 생긴 흔적이 제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아 지웠지만, 이번에는 그런 흔적들이 다른 길로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결과물보다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을 화면에 그대로 남기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진민욱 작. 021갤러리 제공
전통 회화의 구조적 아름다움도 새롭게 다룬다. 계단식 병풍과 앞뒷면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에서는 나무틀과 측면, 뒷면까지 조형 요소로 활용했다.
작가는 "그림은 보통 정면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회화와 입체의 경계는 이미 많이 무너졌다고 생각한다"며 "그림의 표면뿐 아니라 구조적인 부분까지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권혁준
영남일보 권혁준 기자입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