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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경의 사람학교] 스무 평의 선진국

2026-11-0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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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경 한동대 교수

박혜경 한동대 교수

반도체부터 K-뷰티와 K-푸드까지 우리는 세계 시장에서 눈부신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선진국'이라는 말도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왠지 그 말이 잘 꾸민 쇼윈도처럼 느껴진다. 개발도상국의 시간을 오래 살아온 내 생각의 관성 탓일까. 화려한 진열장 뒤, 시민들의 일상도 과연 선진국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 답을 뜻밖의 곳에서 만났다. 동네 책방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았지만, 지날 때마다 슬쩍 들여다보기만 했다. 지난여름, 마침내 용기를 내어 '책방수북'의 문을 밀고 들어섰다. 상주작가가 진행하는 소설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다섯 주 동안 매주 수요일, 나이도 직업도 다른 사람들이 A4 두 장에 저마다의 세계를 써냈다. 오랫동안 학생 글에 빨간 펜을 들던 내가 이번에는 빨간 펜을 받는 자리에 앉았다.


작가를 꿈꾸는 청년들과 문학을 미뤄둔 채 살아온 어른들이 원고를 들고 모였다. 이런 풍경은 '수북'만의 것이 아니다. 전국의 동네 책방에서는 작가와 예술가의 토크 콘서트가 열리고, 서가 사이로 작은 음악회의 선율이 흐른다. 책방은 이제 책을 사고파는 곳을 넘어 주민들이 모여 시를 짓고 이야기를 빚는 마을 공동체이자 지적 놀이터가 되었다.


불현듯 이십 대에 처음 만난 미국 서점에서 받았던 문화 충격이 떠올랐다. 서점에 들른 사람들은 마치 자기 집 거실인 양 바닥에 앉거나 드러누워 책을 읽었고, 곁에서는 아기들이 천으로 만든 책을 장난감 삼아 놀고 있었다. 종이 냄새와 커피 향이 뒤섞인 그곳은 서점이라기보다 시민들의 놀이터였다. 내가 경험한 선진국의 첫 얼굴이었고, 몹시 부러웠다. 그 나라에서는 지금도 독립서점이 늘고 있다고 한다. 미주리의 한 책방 주인은 자기 가게를 '책이 절반, 공동체가 절반'이라 소개한다.


그 부러움이 이제 우리 동네 골목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바야흐로 K-책방의 시대다. 서점의 영업이익률은 0.8%로 카페의 7.2%와 비교하면 9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도 동네 책방은 900곳을 넘는다. 셈이 맞지 않아도 책방을 열고 지키는 사람들에게 그곳은 장사가 아니라 소명이다. 김포에서 아이와 함께 갈 책방이 없어 직접 문을 연 제자의 스무 평 남짓한 '꿈틀책방'도 어느덧 10년째 지친 부모와 아이들 모두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


책방 하나가 주민의 오래된 꿈을 일깨우고, 일면식도 없는 이들을 매주 한 테이블로 불러 모은다. 손님이 독자가 되고, 독자가 작가가 되며, 작가가 다시 이웃이 된다. 책이 사람과 사람을 잇는 힘은 책방 밖에서도 계속된다. 대구시 청년정책과장을 지낸 '책으로 마음 잇기' 김요한 상임대표는 인생 선배와 청년을 책 한 권으로 맺어준다. 학연도 지연도 아닌 '책연'이다. 진짜 선진국의 얼굴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반도체 공급망이 끊길까 마음을 졸인다. 그런데 한 사람의 하루를 지탱하는 행복에도 공급라인이 있다. 작은 책방은 혼자 쓰던 문장에 첫 독자를 붙여주고, 지친 저녁에 음악 한 소절을 건넨다. 나라가 산업의 기반을 지키듯, 국민 행복의 공급라인도 함께 지켜 나가기를 바란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세계 시장이 아니라 골목 안쪽에서 선진국의 얼굴을 직접 만났기 때문이다. 오늘도 어느 동네의 스무 평 남짓한 책방에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그 테이블에서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노래를 듣고, 누군가는 잊고 지낸 자기 이름을 다시 찾는다. 이런 나라에 산다는 것, 요즘 나의 수줍은 자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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