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 있지?"
"마포예요,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그러지. 마포 어디서 만날까?"
배유정은 그가 찾아갈 장소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와 전화를 끊고 나서 오규환은 소파에 앉아 담배를 두 개비나 피웠
다. 그녀가 만나자고 말한 오피스텔의 구조를 그는 알고 있었다. 계간문예
지를 운영하는 친구가 오피스텔을 하나 얻어 가지고 편집실로 사용하고 있
었는데, 이건 말이 사무실이지 욕실까지 갖춘 고급 여관방이었다. 파리에
장기 여행을 떠난 친구의 오피스텔이라고 배유정은 설명했다.
"조용해서 좋아요."
그 말에 호젓하고 은밀한 냄새가 먼저 묻어났다. 심장이 풍선처럼 부풀
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즈음 들어 자신의 언행이 자주 세속적이고
통속적인 범주에 머문다는 사실을 깨닫고 몹시 부끄럽게 여겼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배유정이라는 젊은 아가씨의 경우 특히 그랬다.
그는 잠시나마 불순한 상상력에 빠져 허덕였던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서
둘러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나섰다.
그가 배유정을 다시 만난 것은 대치동에서 잠실로 집을 옮긴지 칠팔 년
뒤였다. 모 여성지에서 보낸 원고청탁서가 그 동기였다. 실연에 관한 글을
써 달라는 것이 잡지사측의 요구였는데, 그 원고를 받으러 나타난 사람이
뜻밖에도 배유정이었다.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스타호텔 커피숍으로 원
고를 들고 나간 오규환 앞에 카메라를 멘 그녀가 웃으면서 다가왔던 것이
다.
"저 배유정이에요. 알아보시겠어요, 선생님?"
빛 바랜 청바지에다 헐렁한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던, 항상
여드름이 이마에 돋아 있던 예전의 어린 면모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정
도로 그녀는 어엿한 숙녀로 변해 있었다.
"언제부터 사진을 찍었지? 내가 알기로 유정이는 전공이 국문학이었는
데."
"맞아요. 저 국문학을 전공했어요.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학교 졸업하고 이수익 선생님 밑에서 사진 공부를 좀
했어요."
"사진작가 이수익씨?"
"네."
"으응, 그랬구먼."
"많이 서툴러요. 오늘 선생님 사진을 촬영해야 하는데, 잘 나오지 못하
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 주셔야 해요."
호수공원을 배경으로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서 헤어졌는데, 문제가 발생
한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미안해요, 선생님."
"왜?"
"그 날 찍은 사진 필름이 통째로 분실되었어요.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촬영을 해야 겠는데, 시간 좀 내주세요, 네?"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처지는 아니었다. 썩 내키지 않
았지만 차마 거절할 입장이 못되어 마지못해 글을 써주기로 약속했던 때와
똑같은 성가신 느낌이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면 어떡하지?"
"저번에 만나 뵈었던 호수공원도 상관은 없지만, 그보다도 선생님, 선생
님 사정이 허락하신다면 우리 교외로 나가 보면 어떨까요?"
전혀 예상 밖의 제의였다. 그까짓 사진 한 장 찍으러 교외까지 따라 나
간다는 것은 아무래도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예사랑 어떠세요? 우리 거기 가 봐요."
예사랑은 신촌역에서 교외선을 타고 가다가 장흥역에서 내리면 대학생들
이 주로 드나드는 술집 이름이었는데, 그가 써 준 글 속에 그 술집 이름이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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