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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미의 브랜드 스토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2012-01-28
[장현미의 브랜드 스토리]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파리 모드계의 교황’이라는 별명으로 기억되는 발렌시아가. 그 별칭은 우아하고 절제된 건축적인 디자인 그리고 완벽한 기술에서 비롯되었다. 한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발렌시아가의 천재적인 재단 기술은 그 어떤 디자이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1895년 스페인 구타리아에서 태어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는 어부였던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면 바느질하며 돈을 버는 어머니 곁에서 재봉일을 도우며 시간을 보냈고, 천부적 솜씨를 타고난 그는 13세에 옷 한벌은 거뜬히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다. 그 무렵 여름, 카사 토레스 후작 가족의 별장에 놀러간 그는 후작 부인이 입은 드레스를 빌려가 며칠 후 부인에게 똑같이 만든 옷을 내보였다. 카사 토레스 후작부인은 프랑스 장인이 만든 오트 쿠튀르 옷보다 더 꼼꼼한 그의 바느질 솜씨에 감탄하였고, 그를 산 세바스찬에 있는 부티크에 추천했다.

1919년 발렌시아가는 산 세바스찬에 자신의 부티크를 오픈했고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도 숍을 차릴 정도로 성장해 나갔다. 뛰어난 테크닉과 완벽주의 덕분에 발렌시아가는 곧 스페인 최고의 디자이너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1937년 스페인 내란으로 인해 가게 문을 닫아야만 했고 그는 프랑스 파리로 갔다. 첫 파리 컬렉션이 대성공을 거두며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발렌시아가의 디자인은 파리지앵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재 부족으로 많은 디자이너가 가게문을 닫을 때 발렌시아가는 부족한 양의 원단을 가지고도 볼륨을 만들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고, 많은 천을 겹치지 않고도 풍성한 실루엣을 만드는 테크닉을 터득하게 된다. 다른 디자이너에겐 위기였던 전쟁의 시기가 그에게는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발렌시아가는 다른 디자이너와 달리 직접 드레이핑과 재단을 하며 손으로 완벽하게 바느질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쿠튀리’ 중 하나였고, 그가 가진 테크닉과 지식은 다른 이가 시도하지 못하는 다양한 볼륨감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그는 유행을 좇지도 않았다. 당시 1940년 디올이 발표한 뉴 룩을 발렌시아가는 1930년대 이미 만들었으며 뉴 룩이 한참 인기를 얻고 있을 때는 10년 뒤 유행하게 될 ‘색(sack)드레스’를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그를 보그는 ‘예언의 불꽃’이라 비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에 정작 주목을 받는 것은 그가 아닐 때가 많았다. 발렌시아가의 뛰어난 구성 테크닉과 실력은 라이벌이었던 샤넬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여성의 몸을 그 자체로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만드는 그의 옷은 당대의 셀러브리티에게 큰 사랑을 받았고 재키 케네디 또한 그 중 하나였다.

발렌시아가는 다른 쿠튀리에(지방시, 쿠레주, 웅가로 등)의 스승이기도 했는데 크리스찬 디올은 그를 모든 디자이너의 마스터라고도 불렀다. 발렌시아가는 프랑스 오트 쿠튀르에 기여한 공헌이 인정되어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으며 프랑스 패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오트 쿠튀르는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게 되었고 프레타 포르테가 패션의 중심에 서기 시작하며 1968년 그는 은퇴를 선언한다. 이는 당시 전세계 패션계에 큰 충격이었다. 그는 코코샤넬의 장례식에서의 행보를 마지막으로 1972년 3월24일 스페인 자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프리앤메지스 수석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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