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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불천위’ 이야기

2012-07-11

드물게도 후손이 중심이 돼, 문중에서 불천위로 결정

이정 불천위에 대해서는 기록이 있다. 1565년 문중에서 불천위로 모시기로 결정했다. 문중에서 결정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유림이 그 과정에 참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517년 이정의 증손자 이훈의 재종숙인 송재(松齋) 이우(1469~1517)가 안동부사 재직 시 이훈에게 ‘사대부 집에서는 모두 4대 봉사를 하고 또 불천위를 받드는데 우리 집은 이미 신주를 땅에 묻었으니 다시 신주를 만들 수는 없고, 가창 조부님(이정)은 본조(조선왕조)의 원종공신이고 자손에게 음덕을 끼쳤으니 내가 체임될 때 족회를 열어 불천위로 모시려고 했으나 지금 병이 깊어 실행하지 못하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 군은 종장(宗長)으로서 내가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을 잊지 말고 불천위로 모실 것을 논의해 내 뜻을 이루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긴 뒤 사망했다.

그 후 주촌(이정 문중) 종손 훈(1538년)과 연(이정의 현손자 1561년)에 이어 5세손 희안이 1563년에 사망하고 1565년 희안의 대상(大祥)이 임박하면서 윗대 신위에 대한 체천(遞遷)이 논의되었다. 그때 송재 이우의 유언을 근거로 불천위 추대가 본격화되었다.

이해에 퇴계 이황은 이정의 6세손 이정회에게 ‘가창 증조부(이정) 신주를 모셔 오고자 했으나 군의 집에 상환(喪患)이 잇따라 결정하지 못하다가 지금 친진(親盡)한 집에서 봉사하는 것은 옳지 않고 찰방(察訪) 형님께서 모셔올 것을 이미 결정했으니 군은 이 뜻을 알고 모든 일을 조치하라’고 했다.

이에 송재와 문중이 결정한 내용을 퇴계에게 고했더니 퇴계는 재삼 ‘송재공께서 예서를 미처 상고하지 못하고 오직 정리(情理)로 결정하신 일이니 받들기 어렵다’고 했다.

이정회가 종가로 돌아와서 문중 어른에게 사정을 고하니 ‘문중에서 송재공의 발의에 따라 결정한 것인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불만스럽다’고 했다. 사흘 뒤 종손 이정회와 집안 어른들이 다시 계상(퇴계 살던 곳)에 갔으나 퇴계의 뜻은 전과 같기에 또다시 의견을 고하고 돌아왔다.

수일이 지난 뒤 퇴계가 이정회를 불러 ‘…우리 형님께서도 칠십을 바라보시고 나도 장차 칠십이 되니 우리 형제가 다 죽으면 다시 가창(주촌 부근으로 진성이씨 선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번번이 왕래하는 것도 미안하니 군이 묘우를 세울 형세가 있으면 나도 돕겠다’고 했다.

얼마 후 사당 준공 무렵 퇴계는 이정회를 다시 불러 ‘…문중에서 이미 결정한 것을 내가 예문에만 따라서 일조에 논파하는 것도 마음에 미안한 일이다. 보본추원(報本追遠)의 뜻을 생각해도 오히려 후하지 못하니, 문중의 논의대로 종가에서 봉향하고 그 이하 신위는 체천하도록 하라’고 말했다.

1565년, 이런 과정을 거친 뒤 족회를 열어 이정을 불천위로 결정했다.

이정 불천위 제사는 기일(음력 8월15일) 자시에 주촌종택(안동시 와룡면 주하1리) 제청인 경류정 대청에서 지낸다. 참석 제관은 60명 정도. 이정의 21세 종손 이세준씨(1947년생)는 4년 전 서울 직장생활을 마치고 종택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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