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경우 지형과 관련된 지명은 62개이며, 이 중 산이나 하천과 관련 있는 땅이름은 95%나 됩니다.”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는 “땅이름은 그 지역의 인문, 자연 지리적 특성과 관련이 깊다”고 말한다. 땅이름은 보통 산이나 하천과 같은 지형적 특성과 유·불교 사상, 인물, 민간설화 등을 반영한다. 자연부락의 이름은 문자 이전에 생긴 것이 많다. 수천년을 거쳐 오는 동안 지명 속에는 그 지역의 정체성이 오롯이 간직되어 있다. 하지만 구전이나 책, 언론을 통해 잘못 알려진 지명이 인터넷을 점령하고, 심지어 관광안내판까지 엉뚱한 내용으로 도배가 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신천과 삿갓바위에 대한 오류 논란은 꽤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하지만 대구시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대구의 잘못된 지명을 조목조목 짚어본다.
1.신천에 대해 잘못 설명하고 있는 관광 안내문
■ 이서는 신천의 물줄기를 돌리지 않았다
수성구 상동에 있는 이공제비 안내문에는 ‘이서가 신천의 물줄기를 돌렸다’고 잘못 기록돼 있다(위). 중구 계산동 계산예가의 계산동 설명 중 ‘동산 밑으로 신천이 흐른다’고 잘못 설명돼 있다(가운데). 방천시장 김광석거리에 있는 신천 설명도 엉터리다. |
◇…신천과 관련한 가장 큰 오해는 신천이 지금의 신천이 아니라는 설이다. 즉 신천의 어원이 1778년 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서가 대구 중심을 흐르던 신천의 잦은 범람으로부터 백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사재를 들여 현재의 물길로 돌린 이후 새로 생긴 물줄기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천은 빙하기 이후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를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유로(流路)를 형성하고 있다.
전 교수는 “이서가 신천의 물줄기를 변경시켰다는 1778년 이전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1425),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1)의 대구편에 이미 신천이란 지명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팔도여지지도(16세기 후반), 광여도(1698~1703), 동국지도( 18세기 중반) 같은 지리서에도 신천의 물줄기는 지금과 같다”고 했다.
신천은 옛 대구의 중심을 흐르는 대구천과 동쪽 금호강 사이, 혹은 대구읍성과 대구부의 속현인 수성현 사이를 흐르는 사이내(川) 혹은 새내였는데, 새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간천(間川)이 아닌 신천(新川)으로 됐다는 설이 있다.
구본욱 대구향교 장의(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가 대구시 수성구 상동 신천변에 있는 이공제 비문을 해석한 바에 따르면,
“판관 이서는 무술년(정조 2년 1778)에 대구의 재(宰)로 부임해 향교의 성묘와 읍터가 모두 신천의 하류에 있었기 때문에 항상 큰물이 지면 침수를 우려했다. 이에 제방을 축조해 오래지 않아 공사를 마쳤다. 이로부터 제사를 지내니 성묘가 편안했다. 또 천금(千金)을 출연해 찹쌀로 내는 토지세와 춘궁기 부역을 영구히 덜게 했다”고 적혀 있다. 비석에도 신천의 물줄기를 돌렸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전 교수는 “이서가 홍수 때 신천의 범람으로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곳은 지금의 수성교 일대”라며 “광복 후 수성교 부근에서 터파기 공사를 하다 이공제 비석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수성교 부근의 신천은 하천지형 특성상 공격사면에 해당돼 홍수가 나면 범람으로 대구읍성 전체가 침수를 당하게 된다.
한편 대구천은 앞산 삼정골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신천의 분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소멸됐다. 다만 대구천 일부가 이천천으로 유로가 변경돼 수성교 부근에서 신천으로 유입되고 있다.
전 교수는 “신천의 원 유로가 상동교 부근에서 분류한다는 주장은 논리적이지 못하다”면서 “지형적으로 볼 때 대구천 일대가 신천보다 높아 대구천 쪽에서 신천 쪽으로 물이 흐를 수는 있어도 신천의 물이 대구천으로 분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16일 위클리포유 대구지오팀은 신천 이공제비와 방천시장 김광석거리, 계산예가, 건들바위, 달성공원 대구향토사박물관 등지를 찾았다. 모든 안내판에는 신천의 물줄기가 지금과 다르며, 이서가 지금의 신천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영남일보는 2007년 신천에 대해 잘못 표기한 것을 지적했음에도 대구시는 하나도 고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1924년 판 대구읍지와 37년 일본어로 발간된 대구독본에서 ‘판관 이서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물길을 돌렸다’고 잘못 기술한 것을 77년 ‘달구벌’이란 책에서 베끼고 옮기면서 잘못된 신천의 역사가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2.건들바위에 삿갓바위 설명을 붙인 엉터리 안내문
■ 서거정의 삿갓바위는 건들바위가 아니다
정만진(왼쪽)·전영권 위클리포유 대구지오 자문위원이 중구 대봉동 건들바위에 대한 설명이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있다(위). 해동지도(아래 왼쪽)와 달성도에는 삿갓바위(원 점선)가 신천하류 부근 서편에 위치해 있다. |
◇…‘건들바위라는 이름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예로부터 그 모양이 갓 쓴 노인 같다고 해서 삿갓바위라고도 불려 왔다. 조선시대 후기 대구의 중심부로 지나는 물길을 신천으로 돌리기 전에는 바위 앞으로 맑고 깊은 냇물이 흘러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며 즐겼던 명소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대구 10경의 하나로 서거정 선생이 지은 ‘삿갓바위에서의 낚시(笠巖釣魚)’가 바로 이곳을 두고 읊은 시다. 최근까지만 해도 점쟁이와 무당들이 몰려와 치성을 드리곤 했는데, 특히 아기를 갖지 못한 부인이 치성을 드리면 효험이 있다고 하여 많이 찾는다.’
이상은 대구시 중구 대봉동 건들바위(대구시기념물 2호)의 안내문이다. 하지만 엉터리다.
건들바위가 있는 행정지역은 조선시대 대구부 하수서면(동변입암리, 서변입암리) 입암리다. 그러므로 삿갓바위가 아닌 단순히 ‘서 있는 바위’즉 선바위(立巖)일 뿐이다.
경상도지리지에는 대구군 동쪽 2리쯤 신천 가운데 삿갓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고 적혀있다. 18세기 초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삿갓바위가 경상감영 북동쪽 신천변에 위치한다. 하지만 현재 건들바위는 경상감영 남쪽이다. 위치도 틀릴 뿐더러 모양도 맞지 않다. 건들바위 위에서는 낚시를 하기도 어렵다.
고려사에 따르면 문종 24년(1070)에 대구현에 별이 떨어져 돌이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별똥별인 셈이다.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에서 소개한 삿갓바위는 유성이 떨어진 운석이라고 했다. 운석은 적어도 화강암 같은 단단한 재질이지만, 지금의 건들바위는 퇴적암이다.
택민국학연구원이 펴낸 자료에 따르면 신천 경대교에서 상류쪽, 즉 북구 대현2동 부근에 높이 10m 규모의 갓모양을 한 바위가 존재했다고 한다. 넓은 반석 위에 서 있는 삿갓바위는 당시 부녀자들이 촛불기도를 드리는 장소로 유명했으나 70여년 전 신천의 범람을 막기 위해 강변 정비 공사를 하던 중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지금은 사라졌다고 전해온다.
해동지도와 서거정의 ‘대구십영’위치가 모두 나오는 ‘달성도(達城圖)’에는 삿갓바위의 위치가 신천 서편에 그려져 있다.
전영권 교수는 “1957년 제작된 지형도를 보면 해동지도나 달성도에서 보는 것과 같이 북구 칠성동을 지나 도청교 부근 하류로 유입하는 물줄기를 볼 수 있는데 이 물줄기 중 침산교 인근에 지금은 사라진 삿갓바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또 “경대교 상류 신천 동편에 작은 규모의 하식애 언덕이 발달하고 있어 삿갓바위가 위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건들바위 역사공원에 있는 대구천 설명에도 이서가 대구천의 물길을 신천으로 돌렸다고 틀리게 나와 있다. 또한 건들바위를 설명하는 비문에도 이곳이 서거정이 읊었던 삿갓바위, 즉 입암조어의 자리라고 잘못 쓰여 있다. 또 건들바위가 높이 3m, 폭 1.6m라고 나와 있는데 실제 높이는 6~7m에 이르며, 폭은 4~5m나 된다.
건들바위에 대한 잘못된 설명은 1982년에 펴낸 ‘대구의 향기’180쪽에 ‘바위 모양이 삿갓 쓴 늙은이 같다’고 엉뚱하게 기재한 데서 유래한다.
3.거북과 자라가 어떻게 같을 수 있나
■ 연구산 돌거북은 자라바위가 아니다
대구제일중에 있는 연구산 돌거북 비석에는 거북바위로 돼 있으나(오른쪽 위) 안내판(왼쪽 아래)설명은 오류 투성이다. 시민안전테마파크에 있는 연구산 돌거북은 자라바위로 표기하고 있다. |
◇…빌딩이 없던 옛날 대구읍성 남쪽 현재의 중구 봉산동 제일중 자리는 조그만 산이었다. 1945년 일제강점기 제일중의 전신인 대구여상이 개교하기 전만해도 시민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정월대보름 달맞이를 하기에 좋은 산이라고 해서 월견산(月見山), 조선 순종 때부터 정오를 알리는 대포를 쏜 곳이라 해서 오포산(午砲山)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정확한 명칭은 연구산(連龜山)이다.
경상도지리지(세종 7년)에 따르면 ‘대구에 연구산이 있는데 돌로 거북을 만들어 산등성이에 머리를 남쪽, 꼬리를 북쪽으로 묻어 맥을 이은 까닭으로 이을 연(連), 거북 구(龜)자를 써서 연구산으로 한다’고 나와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적혀있다.
이정웅 달구벌 얼찾기 모임 회장(위클리포유 자문위원)은 “대구읍성 남쪽에 위치한 앞산(성불산)이 불꽃 형상을 하고 있어 화재피해로부터 후손을 보호하기 위해 불을 제압하는 거북을 돌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했다.
하지만 1934년 일본 학자는 이 돌거북을 청동기시대 유적이라고 주장했다. 서거정이 지은 대구십영 중 3영 ‘거북 봉우리의 봄 구름’인 구수춘운(龜岫春雲)도 바로 연구산을 바라보고 읊은 시다.
거북바위를 자라바위라고도 한다는 것은 서거정의 시 ‘龜岫隱隱似鰲岑(구수은은사오잠)-거북뫼 은은하여 자라뫼 닮았네’에서 유래된 듯하다.
연구산은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이용되기도 하고, 대구의 수호신으로 서낭당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석빙고도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정웅 회장은 “거북과 자라는 종이 다르다. 거북은 바다에서 살고 십장생에도 들어가는 영물이지만, 자라는 하천에 사는데 어떻게 같은가”라면서 “혼용해 쓰지 말고 거북바위로 통일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돌거북은 옛 대구의 진산이었던 연구산의 상징물인데, 대구가 문화재로 지정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15일 대구지오팀은 제일중을 찾아 거북바위 안내판을 살펴봤다. 잘못된 글자와 내용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안내판의 앞부분 자라는 거북으로, 수도산(修道山)은 수도산(水道山)으로, 화산지대는 불이 잘 나는 형국으로, 1980년은 1908년으로, 예제단(禮祭壇)은 여제단(勵祭壇)으로, 구암춘운(龜岩春雲)은 구수춘운(龜岫春雲)으로 고쳐야 마땅하다. 향토사교육연구회가 발간한 대구역사기행(2002)에서도 거북바위 대신 자라바위라고 쓰여 있다.
대구시소방본부가 팔공산에 시민안전테마파크를 조성하면서 실물크기의 돌거북 모형을 이곳에 만들었으나 이곳 역시 자라바위로 돼있다.
이 회장은 “거북은 대구의 상징동물이라면서 ‘2011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때 삽살개 대신 거북을 마스코트로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서울은 해태, 강원도는 반달곰이 대표 동물이듯 대구도 상징동물을 만든다면 거북으로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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