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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0] 서울 ‘숭례문’

2013-12-25

화마도 꺾지 못한 ‘600년 역사의 魂’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0] 서울 ‘숭례문’
2008년 화재 후 다시 복원된 숭례문 전경. 조급한 복원으로 단청이 벗겨지고 기둥이 갈라지는 등으로 부실 복원 논란을 빚고 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都城)의 남쪽 문이자 정문 역할을 했던 국보 1호인 서울 숭례문(崇禮門). 2008년 2월에 방화로 목재로 지은 문루(門樓) 대부분이 타 버렸고, 이후 5년 이상 걸린 복구사업을 통해 2013년 5월에 복원됐다. 화재를 면하거나 피해가 크지 않은 기존 부재를 최대한 사용해 문루를 복구하고, 일제에 의해 제거된 양측의 성곽 일부도 복원해 마무리했다.

6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숭례문의 문루는 불과 6시간 만에 잿더미로 변해버렸지만, ‘숭례문’ 현판은 화마를 피해 수습될 수 있었다. 이때 구출된 현판은 1년5개월에 걸쳐 복원됐고, 숭례문 복원 공사가 마무리된 후 제자리에 걸리게 되었다. 이로써 현판은 문루를 받치고 있는 석축 일부와 함께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화재 때 수습한 편액을 복원하기 위해 해체·분석한 결과, 앞판은 38개의 크고 작은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다. 뒤판은 앞판을 고정하고 보강하기 위해 15개의 판재를 가로로 잇대어 붙여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 한 개의 판으로 되어 있던 앞판이 조각난 것은 6·25전쟁 당시 포탄 파편 등으로 훼손된 것을 나무판으로 땜질식 수리를 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번에 복원할 때, 화재 당시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조각이 많이 난 테두리는 새 나무판을 사용했다.

그리고 서울 지덕사(至德祠·양녕대군 사당)에 소장된, 150년 전의 ‘숭례문(崇禮門)’ 현판 탁본자료 등을 토대로 ‘숭례문’ 글씨 원형을 확인해 6·25전쟁 후에 보수되면서 일부 변형된 ‘숭’자와 ‘례’자의 부분을 바로잡았다. 이렇게 해 600여년의 역사를 다시 이어가게 됐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0] 서울 ‘숭례문’
화재 때 구해낸 현판을 토대로 새로 복원해 건 ‘숭례문’ 현판.

秋史 김정희도 감탄한 글씨
힘 넘치는 세로 글씨 편액
물의 기운으로 불 다스려
실록 등에 정확한 기록 없어
누가 쓴 글씨인지 ‘說’ 분분

◆‘숭례문’ 글씨 주인공은 누구일까

조선의 명필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자택이 있던 과천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날이면 꼭 숭례문 앞을 찾았다. 숭례문 현판 글씨를 보기 위해서였다. 추사는 ‘숭례문’ 석 자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감탄했다고 한다. ‘숭례문’ 글씨는 이처럼 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도 감탄할 정도로 힘이 넘치고 멋진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설이 많다. 글씨를 쓴 사람의 낙관이 없고 실록 등에도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오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유력한 설 중의 하나가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 이제(1394~1462)가 썼다는 것이다. 양녕대군은 태종의 명을 받아 경복궁 ‘경회루’ 현판 글씨를 썼을 만큼 필력을 인정받았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경성의)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 하는데, 겹처마이다.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는 남대문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1614년에 간행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이 내용이 답습되면서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1871년에 쓰인 이유원(1814~88)의 ‘임하일기(林下筆記)’에서는 ‘숭례문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세상에 전하는데, 이것은 지봉유설에서 나온 말이다’라고 하면서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에 올라가 판각에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대서(後板大書)는 공조판서 류진동(柳辰仝)의 글씨였다고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이 아닌가 싶다’고 기록했다. 양녕대군 설을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1962년 숭례문을 해체 복원하면서 편액을 살핀 결과 ‘후판대서’ 등의 흔적이 없어, 신빙성이 별로 없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한편 추사는 한 서간에서 ‘숭례문 편액은 신장의 글씨인데 깊이 뼛속까지 들어갔고…’라고 적고 있다. 간찰에 적은 글이긴 하지만 고증학의 대가이기도 한 추사가 아무런 근거 없이 기존의 설을 버리고 신장의 글씨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거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당대의 명필 암헌(巖軒) 신장(1382~1433)은 조선 초기 문신인 신숙주의 아버지다.

숭례문은 1396년에 입주상량이 이뤄지고 1398년에 완공되었으니, 늦어도 1398년에 편액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녕대군이나 신장의 글씨라고 하더라도, 최초의 편액 글씨를 쓴 주인공은 아닐 것이다. 이 밖에 이규경(1788~?)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숭례문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다’고 적고 있다. 이조판서·호조 판서 등을 지낸 허백당(虛白堂) 정난종(1433~89)은 서예에 일가를 이루어 초서·예서를 특히 잘 썼다. 촉체(蜀體)에도 뛰어났다.

◆세로 현판인 이유

숭례문 현판은 소나무로 만들어졌다. 글씨는 양각으로 돋을새김해 백분(白粉)을 칠하고 바닥은 흑칠을 했다. 테두리는 단청으로 장식했다. 조선시대 궁궐 현판의 전형적인 제작방식이다. 그런데 현판 대부분이 가로 글씨인 것과 달리 숭례문은 세로로 쓰여 있다. 그 이유로 관악산 화기설(火氣說)이 가장 유력하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도성을 옮기기로 정한 뒤, 백악(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경복궁을 남향으로 앉히려다 보니, 한양의 조산(朝山)인 관악산이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런데 관악산은 마치 그 모양이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이라, 예로부터 ‘화산(火山)’ 또는 ‘화형산(火形山)’이라 불리었다. 풍수가들은 여기서 뿜어나오는 강한 화기가 궁을 범한다고 보고 그 방책을 강구했다. 풍수에서 화기는 물로 다스릴 수 있다고 하지만, 관악산의 화기는 너무 강해 한강이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큰 문을 정남쪽에 세워 화기와 정면으로 대응해 막게 했다. 그리고 문의 현판 이름도 화기를 누르라는 의미로 ‘숭례문’으로 하고, 현판도 세로로 제작해 달았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므로, 세로는 물의 기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숭례문’은 원래 ‘예를 숭상하는 문’이란 뜻이지만 ‘예’자가 오행으로 불에 해당하고, 또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숭’자와 더불어 세로로 달게 함으로써, 불을 불로 다스린다는 ‘이화치화(以火治火)’의 방책을 썼다는 해설도 있다.

‘숭례문’ 이름은 삼봉(三峰) 정도전(1342~98)이 지었다.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며 궁궐이나 전각 이름, 거리의 이름을 손수 지었다. 그는 1395년 도성축조 책임자가 되어 북악산, 남산, 인왕산 등을 잇는 성벽을 쌓고, 성곽의 4대문 등을 건설하면서 유교 핵심 덕목인 오상(五常), 즉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을 담았다. 동대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 북문은 ‘홍지문(弘智門)’이라 이름지었다. 동대문의 경우 ‘흥인문’이라 하지 않고 ‘지’자를 넣어 ‘흥인지문’이라 한 것은 문 앞의 평평한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중앙의 누각 이름을 ‘보신각(普信閣)’이라 하였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국보1호의 얼굴 ‘숭례문’ 현판, 그날 불기둥 속에서 이렇게 살아났다

2008년 2월10일 일어난 숭례문 방화로 서울의 숭례문이 전소됐다. 화재는 2월10일 오후 8시40분쯤에 발생, 다음날인 2월11일 0시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했다.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54분,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

10일 밤 11시쯤, 숭례문 화재현장에서 진화작업을 벌이던 소방대원에게 특명이 떨어졌다. 숭례문 현판을 구하라는 것이다.

10일 밤 10시40분께 2층 누각 현판 부근에서 너비 5~6m의 불기둥이 치솟기 시작했다. 이젠 ‘어느 정도의 피해’는 고사하고 전소를 막는 것이 유일한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20여분이 흘렀다. 불은 점차 거세졌다. 국보1호의 골격을 지키는 것조차 위태로워졌다.

무엇보다 급박한 것은 ‘숭례문’ 현판을 화마로부터 피신시키는 일이었다. 현판 부근에서 불기둥이 치솟아 자칫하면 추사 김정희도 탄복했다는 ‘숭례문’ 현판이 한 줌 재로 사라질 위기였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에서도 ‘현판이라도 살려야 한다’고 마지막 의견을 냈다.

11시쯤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숭례문 현판을 확보하라.’

명령을 받은 두 소방대원이 고가 사다리를 이용, 현판 쪽으로 접근했다. 짙은 연기 너머로 성난 화마가 붉은 혀를 널름거리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 소방대원이 톱으로 현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10분여의 톱질 끝에 현판이 땅으로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현판은 곧장 6명의 전의경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졌다.

현판이 떨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2층 누각 기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대피하라”는 소리가 터졌다. 접근해 있던 소방대원에게도 철수지시가 내려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숭례문은 2층 귀퉁이부터 무너지면서 전소됐다.

이렇게 해서 비록 현판의 귀퉁이 일부가 부서졌지만, ‘숭례문’ 글자가 쓰인 부분은 살렸다. 덕분에 현판을 다시 복원, 600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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