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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2]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2014-01-22

“사바세계를 무대로 한바탕 연극을 멋지게 해보라”
통도사 군자로 추앙 선승 경봉…30년간 삼소굴서 선풍 드날려
대구의 석재 서병오와도 인연…편액 받고 서예도 배우며 교유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2]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 선사인 경봉 스님이 머물며 선풍을 드날렸던 삼소굴(三笑窟). 양산 통도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의 작은 건물로, 건물 이름은 경봉이 지었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2]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조선 말기 화가 최북의 ‘호계삼소도’. 삼소굴의 ‘삼소’는 ‘호계삼소(虎溪三笑)’에서 나온 것이다.


경봉(鏡峰) 정석(靖錫·1892~1982). 우리나라 근대의 대표적 선승인 경봉은 뛰어난 설법으로 양산 통도사의 부속 암자인 극락암을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암자로 만들었다. 그는 1953년 극락암의 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돼 전국에서 찾아오는 선승과 대중에게 선문답과 설법으로 불법(佛法)을 깨우치며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킨 선사다. 특히 1973년부터 입적한 해인 1982년까지 매월 연 정기법회에는 전국에서 신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가 50년 동안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린 처소가 극락암의 조그마한 건물 ‘삼소굴(三笑窟)’이다. ‘삼소굴’이라는 당호 역시 경봉이 지었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2]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삼소굴’ 편액. ‘팔능거사’로 전국에 명성을 날리던 대구의 서화가 석재 서병오의 글씨다.

◆삼소굴의 의미

삼소굴의 ‘삼소’는 세 사람이 웃는다는 의미로 ‘호계라는 시냇가에서 세 사람이 웃는다(虎溪三笑)’라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호계삼소’는 유교·불교·도교의 진리가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다. 중국 송나라 진성유(陳聖兪)가 지은 ‘여산기(廬山記)’에 나온다.

동진(東晋)의 고승 혜원(慧遠·334~416)은 중국 불교 정토교의 개조(開祖)로 알려져 있다. 그는 처음에는 유학을 배웠고, 이어 도교에 심취했다. 그러나 스무살이 지난 뒤에는 승려가 되어 여산에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머물며 수행했다. 입산 후 그는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影不出山 跡不入俗)’라는 글귀를 걸어두고, 다시는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그런 혜원은 찾아온 손님을 보낼 때는 언제나 사찰 아래 있는 시내인 ‘호계’까지 가서 작별 인사를 했다. 호계를 건너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 유학자이고 시인인 도연명(陶淵明·365~427)과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406~477)을 배웅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청담(淸談)에 빠져, 자신도 모르게 호계를 지나고 말았다. 그의 수행을 돕던 호랑이가 그것을 보고 울음소리를 내자 문득 이 사실을 안 세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의 생몰연대로 보아 이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은 아닐 것이나, 송나라 이후 시인묵객들은 이를 소재로 시를 짓고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은 ‘호계삼소도’ 또는 ‘삼소도’라 불리는데, 송나라 화승 석각(石恪)이 처음 그린 이후 많은 화가가 다양한 호계삼소도를 그렸다.

당나라 시인 이백은 이 이야기와 관련해 ‘별동림사승(別東林寺僧)’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동림사에서 손님을 배웅하던 곳(東林送客處)/ 달 뜨고 흰 원숭이 우네(月出白猿啼)/ 여산에서 멀리 나와 웃으며 헤어지니(笑別廬山遠)/ 호계를 지남을 어찌 성가셔 하리(何煩過虎溪).’

경봉도 작은 집에 ‘삼소굴’ 편액을 단 후 극락암을 벗어나지 않고 도를 지키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삼소할 지음(知音)을 만나길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삼소굴 편액은 서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대구의 석재(石齋) 서병오(1862~1936) 글씨다. 석재는 ‘팔능거사(八能居士)’로 불리던 천재 예술가로, 중국과 일본을 주유하며 탁월한 시·서·화 실력으로 당대 문인과 서화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인물이다.

극락암에는 석재의 글씨가 많이 남아있다. 삼소굴 옆의 ‘원광재(圓光齋)’ 편액도 석재의 글씨다. ‘원광’은 경봉의 다른 호다. 극락암 누각인 ‘영월루(映月樓)’ 편액 글씨도 석재가 썼다. 석재와 경봉은 서로 교유했으며, 경봉은 석재에게 서예를 배우기도 했다 한다.

‘스무해 전 통도사에서(二十年前通度寺)/ 옥 같은 사람이 술 들고 글씨 받으러 왔는데(玉人携酒乞書來)/ 가련하다 같이 병들어 서로 보기 어려우니(相憐同病難相見)/ 사랑하는 회포를 풀 길이 없구나(懷抱無由得好開).’

석재가 별세 두 해 전인 1934년에 남긴 이 작품 등을 감안할 때, 석재는 통도사에 한 번 이상 들른 것으로 보인다. 극락암의 편액 글씨들은 1920년을 전후해 극락암에 들러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삼소굴 기둥에 걸린 주련 4개는 경봉의 오도송(悟道頌)으로, 글씨는 회산(晦山) 박기돈(1873~1947)이 썼다.

‘내가 나를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我是訪五物物頭)/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네(目前卽見主人樓)/ 허허 이제 만나 의혹 없으니(呵呵逢着無疑惑)/ 우담발화 꽃 빛이 온누리에 흐르누나(優鉢花光法界流).’

◆경봉스님은

‘통도사 군자’ ‘영축산 도인’으로 추앙받았던 경봉. 밀양에서 태어나 7세 때부터 사서삼경 등 한학을 배운 경봉은 15세 때 모친상을 당한 뒤 생사의 이치를 깨닫는 길을 걷고자 결심, 이듬해 양산 통도사로 출가했다. 24세 되던 해 화엄경의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 푼어치의 이익이 없다(終日數他寶 自無半錢分)’라는 대목을 보고, 참선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통도사를 떠난다. 그후 내원사, 해인사, 직지사 등의 선원에서 참선수행에 전념하던 그는 1927년 12월 통도사 극락암에서 철야정진하던 중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은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는다. 이때 지은 오도송이 삼소굴 기둥에 걸린 주련 내용이다.

이후 통도사 주지 등을 역임하며 대중포교와 후학지도에 힘쓰다 1953년 극락암 호국선원 조실로 추대되고, 그 후 삼소굴에서 30년간 머물며 선풍을 드날린다. 82세 되던 1973년부터는 매월 첫째 일요일에 극락암에서 정기법회를 열었는데, 매회 1천여명의 대중이 참석했다. 그는 찾아오는 이들에게 “사바세계를 무대로 한바탕 연극을 멋지게 해보라”는 말을 즐겨 하곤 했다. 1982년 7월17일 “스님, 가신 뒤에도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라고 상좌 스님이 묻자 “야반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보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했다.

그는 또한 1910년 1월부터 76년 4월까지 중요한 일을 기록한 일지를 남겼고, 후에 ‘삼소굴일지’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이 일지는 선사들의 법담과 선시, 일상과 사찰 행사 등을 담고 있어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경봉은 글씨도 잘 쓰고 시도 잘 지었다. 한시와 더불어 수많은 편액·주련 작품을 남겨 전국 곳곳의 사찰에서 그의 필적을 만날 수 있다.

극락암에도 물론 그의 글씨 편액이 많다. 다양한 서체로 쓴 ‘방장(方丈)’ ‘무진장(無盡藏)’ ‘설법전(說法殿)’ ‘호국선원(護國禪院)’ ‘여여문(如如門)’ ‘정수보각(正受寶閣)’ 등의 편액이 모두 그의 글씨다. 주련 글씨도 적지 않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2]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
경봉 글씨 편액 ‘무진장’.

▨‘팔능거사’로 불리던 시·서·화 삼절(三絶) 석재 서병오

석재 서병오는 대구 출신으로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재능을 발휘,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인 허유·곽종석 문하에서 유학을 공부하고, 글씨는 당대 명필로 이름난 서석지의 가르침을 받으며 연마했다.

그의 시·서·화 실력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내 한양의 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까지 그의 명성이 전해지고, 18세 때 흥선대원군의 초청으로 대원군 거처인 운현궁을 드나들게 되면서 추사 김정희 서화의 영향도 받게 된다. 한양에서 그는 특출한 시·서·화 솜씨로 당대의 시인묵객과 정치인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기도 했다. 그가 빠지게 되면 모임이나 행사를 연기할 정도였다.

시·서·화뿐만 아니라 바둑, 장기, 거문고, 의술, 언변까지 능해 팔능거사로 불렸던 그에 대해 춘원 이광수는 ‘희대의 천재’라며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중국 상하이로 가서 당시 그곳에 망명 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그의 소개로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중국인 서화가 포화(蒲華)·오창석(吳昌碩) 등과 가까이 접촉하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중년 이후 두 차례의 중국 주유와 세 차례의 일본 외유를 통해 그의 서화작품은 더욱 발전해 자신만의 개성이 두드러진 ‘석재죽(石齋竹)’ ‘석재난(石齋蘭)’을 남기게 된다.

만년에는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嶠南詩書畵硏究會)를 설립(1922년)해 후학을 지도하면서 전국의 유명 서화인들과 교류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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