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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3] 진주 ‘촉석루’

2014-02-05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3] 진주 ‘촉석루’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로,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科擧)를 치르는 장소 등으로 사용되던 촉석루.


정현복, 두개의 ‘촉석루’ 편액중 강쪽 작품 만들어
천 석의 재산도 서예를 위해 다 쓸 정도로 정성
"촉석루가 황폐한 지 오래된 것도 고을의 책임”
고을 어른 강순·최복린 등이 추렴해 중건 제안

진주 남강 바위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는 촉석루(矗石樓·경남 진주시 본성동)는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과거를 치르는 장소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누각 이름이 남장대(南將臺) 또는 장원루(壯元樓)로도 불리었다. 지금도 누각 처마의 ‘촉석루’라는 편액과 함께 ‘남장대’라는 편액이 누각 안에 걸려 있다.

촉석루는 고려 공민왕 때(1365년) 처음 건립되었다. 그후 1379년에 왜구가 불태운 것을 1413년, 진주 출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하륜이 제안하고 당시 진주 목사 등이 주선하여 고을 사람들의 힘을 모아 재건했다. 그후 여러 차례 중수했고, 1948년에는 국보로 지정되기도 했으나 6·25전쟁으로 불타버려 1960년에 다시 지었다. 이 촉석루에서는 진주 출신 근대 명필의 글씨 편액들을 만날 수 있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3] 진주 ‘촉석루’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3] 진주 ‘촉석루’
촉석루 앞뒤 처마에 걸린 ‘촉석루’ 편액. 당대의 명필 송하 조윤형(위쪽)과 유당 정현복의 글씨다.

◆조윤형·정현복의 ‘촉석루’, 정명수의 ‘남장대’ 편액

촉석루에는 누각 앞과 뒤 처마에 ‘촉석루’ 편액이 하나씩 걸려있고, 누각 마루에 오르면 누각 안쪽에 ‘남장대’와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 편액이 걸려있다.

강쪽의 ‘촉석루’ 편액 글씨는 유당(惟堂) 정현복(1909~73)의 작품이고, 반대편 ‘촉석루’ 편액은 송하(松下) 조윤형(1725~99) 글씨다.

송하는 원교(圓嶠) 이광사에게 글씨를 배웠으며 각 체의 글씨에 능했다. 그중에서도 획법이 굳세고 예스러운 해서와 원교를 본받은 초서를 특히 잘 썼다. 글씨로 벼슬을 할 만큼 당대 명필로 이름이 높았던 송하는 당시 공관의 금석(金石)과 편액의 글씨를 도맡아 썼다고 한다. 사찰 편액으로는 공주 마곡사 ‘심검당’, 김천 직지사 ‘황악산직지사’ 편액 등이 남아 있다.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그는 ‘그림에 정선과 김홍도가 있다면 글씨에는 조윤형이 있다’는 말도 들었다.

진주에서 활동한 유당 정현복은 서예는 물론, 소리와 북연주에도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합천 출신으로 어린 시절 한학과 붓글씨를 배운 그는 일찍이 진주로 이주해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서예 활동을 한 것은 30세 이후이고, 천 석 재산을 서예를 위해 다 쓸 정도로 붓글씨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그는 또 아무에게나 작품을 주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모양이다. 자신의 집에 기생들이 많이 출입했지만 그들이 한 장도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두주불사하는 호방함과 거침없는 성격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나는 그의 행서는 머뭇거림이나 꾸밈이 없는, 특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횡행서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촉석루’는 유당이 50세 때 쓴 작품이다. 이 편액은 원래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로 만들었으나, 민주당이 집권하면서 그 글씨를 깎아내고 유당의 글씨를 새로 새겼다고 한다. 유당은 이 작품 하나를 건지기 위해 500장을 썼다고 한다. 유암(有菴) 이후림(1893~1972)이 만년에 강학한 곳인, 경남 사천(곤명면 은사리)의 ‘은구재(隱求齋)’ 편액 글씨도 그의 작품인데, 이것도 200장을 써서 그중에 하나를 골라 준 것이라고 한다.

‘남장대’는 은초(隱樵) 정명수(1909~2001)의 글씨다. 그는 진주에서 태어나 부친이 건립한 ‘비봉루(飛鳳樓)’의 현판을 쓰기 위해 서예에 입문했다 한다. 평생을 서예에 매진하면서 진주를 벗어나지 않고 작품 활동과 후진 양성에만 진력하였으며, 부친이 건립한 비봉루에서 활동하다가 별세했다. 서예에 입문할 당시 진주의 비봉산 자락의 의곡사에 머물고 있던 추사체의 대가 성파(星坡) 하동주(1865~1943)에게 체계적으로 서예를 배워 그 맥을 이었다.

진주성의 진남루(북장대)에 걸린 ‘진남루(鎭南樓)’ 편액도 그의 글씨다.

‘영남제일형승’은 청남(菁南) 오제봉(1908~91)의 글씨다. 김천 출신의 청남은 출가 후 서예에 정진, 일가를 이루었다. 경남 진주시 상봉동에 있는 의곡사의 주지로 시인·묵객·화가·서예인 등 예술가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등 향토예술인 양성과 후원에 남다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만년에는 부산으로 옮겨 서예실을 운영하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하륜의 촉석루기(矗石樓記)

‘촉석루’라는 이름은 남강 가운데 뾰족뾰족한 돌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륜이 지은 촉석루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누각을 짓고 운영하는 것은 다스리는 자의 여가 활용일 따름이다. 그러나 누각의 건립이나 황폐화는 한 고을의 인심을 알게 하고, 고을 인심으로 한 시대의 세도(世道: 세상 다스리는 도리)를 알 수 있다. 그러니 어찌 하찮은 일이라 함부로 여기겠는가. 내가 이런 말을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지금 우리 고을 촉석루를 보며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누각은 용두사(龍頭寺) 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내가 소년 때 여러 번 올랐던 곳이다. 누각의 규모가 크고 높으며 확 트여 있다. 마을의 뽕나무와 대나무가 그 사이에 은은하게 비치고, 푸른 석벽에 긴 모래톱이 길게 잇닿아 있다. 사람의 기상이 맑고 풍속이 온후하여 농부와 누에 치는 아낙네는 부지런하고, 아들과 손자는 효도에 힘을 다한다. 새들은 울고 날며, 물고기와 자라가 헤엄치고 자맥질하며 즐기는 것까지도 모두 볼 만하다.

누각 이름을 지은 뜻에 대해 담암(談庵) 선생은 ‘강 가운데 뾰족뾰족한 돌이 있는 까닭으로 누각 이름을 촉석이라 한다’고 했다. 이 누각은 김공이 짓기 시작하고, 안상헌(安常軒)이 두 번째로 완성했는데 모두 과거에 장원한 분들이라서 또 장원루(壯元樓)라는 명칭도 있다.

…머리 희끗한 늙은이가 술잔을 주고받으며 ‘오늘날 우리 눈으로 태평세월을 볼 줄을 생각이나 했는가’라며 새 왕조의 선정을 경축하고 있다. 그러나 임금의 마음은 ‘나의 다스림이 아직 흡족하지 못하다’ 하시며 매양 교지를 내려 백성의 노역을 엄금하므로, 수령으로서는 농사와 학교에 관한 일 외에는 감히 한 가지 역사도 마음대로 일으키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고을의 나이 많은 어른인 전 판사 강순(姜順), 전 사간 최복린(崔卜麟) 등이 의논하기를, … 촉석루가 황폐한 지 오래되었으나 중건하지 못했으니 이는 우리 고을 사람들의 책임이라며 누각 중건을 제안했다. 이에 각자 재물을 추렴하고 용두사 주지 단영(端永)에게 그 일을 주관하게 했다. 나는 이것을 임금께도 들리게 해 이를 금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니, 그때가 임진년(1412) 12월이었다.”

하륜은 이어 이듬해 강둑을 쌓고 누각을 완공한 일 등을 적은 후 마을 어른들이 기문을 지어 남길 것을 요청한 사실을 언급했다. 그리고 누각이 주는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문을 마무리했다.

‘나도 벼슬을 그만둘 날이 이미 가까우니, 필마로 시골에 돌아와서 여러 마을 노인들과 함께 좋은 시절 좋은 날에 이 누각에서 술잔을 들고 시를 읊조리고 함께 즐기면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니, 노인들은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촉석루 삼장사’ 이야기

촉석루 입구에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세 명의 관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촉석루중삼장사기실비(矗石樓中三壯士記實碑)’가 있다. 그 주인공인 김성일(金誠一·1538~93), 조종도(趙宗道·1537~97), 이로(李魯·1544~98)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촉석루 삼장사’는 김성일이 촉석루에 올라 지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비문은 1960년 김황(金榥·1896~1978)이 지었다.

“선조 임진년 5월에 문충공 학봉 김성일은 영남초유사로 진양성에 도착해 충의공(忠毅公) 대소헌(大笑軒) 조종도, 정의공(貞義公) 송암(松巖) 이로와 함께 촉석루에 오른다. 당시는 왜란으로 강토에 선지피가 낭자하던 때였으니, 벼슬아치는 모두 달아나고 군사와 백성은 흩어졌다. 성 안은 텅 비어 쓸쓸하고, 강물만 옛날처럼 아득히 흐른다. 멀리 눈을 들어 조국 산하를 바라보니, 오직 슬프고 분함에 마음 저려 조공과 이공은 초유사 김공의 손을 잡고 ‘삶이 욕되도다.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한을 씻자’고 했으나, 학봉은 ‘그것은 잠시 괴로움을 잊는 일일 뿐이고 한은 천추에 씻지 못할 것이다. 한 번뿐인 장부의 죽음을 어찌 허술히 하겠는가. 여기 푸른 물굽이 아직 뜻이 있어 흐르거늘 남은 목숨은 원수 앞에 더욱 질길 것이니, 이 유서 깊은 터전을 지켜 나라 은혜를 갚으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분연히 맹세하며 술 한 잔 높이 들고 시 한 수를 읊었다. ‘촉석루의 삼장사는/ 잔 들고 웃으며 강물 바라보니/ 강물은 도도하게 흘러가네 / 강물 마르지 않듯 우리 넋도 영원하리.’

이 시는 뒤에 부임한 순찰사가 새겨 높이 현판으로 달았으니, 이로써 이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후인들이 촉석루 삼장사라 일컬었다. 세 현자의 자세한 내력은 각기 그 문집과 역사 기록에 남았으니, 여기 다만 이 한 가지 사실만 돌에 새기고 촉석루 곁에 세워 지나는 나그네로 하여금 발을 멈추게 하니, 때는 임진년으로부터 삼백예순아홉해가 지난 뒤의 일이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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