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닫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네이버
    밴드
  • 네이버
    블로그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40305.010200800340001

영남일보TV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끝>]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2014-03-05

“하늘이 내린 차례가 그대…진실로 그 중심을 잡도록 하라”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중국 최대 목조 건물인 자금성 태화전. 주요 전각의 외부 현판 글씨는 대부분 청나라 강희제가 썼다고 한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자금성 중화전 내부에 걸린 편액 ‘윤집궐중(允執厥中)’. 청나라 건륭제 글씨다.


조카를 제치고 황위를 차지한 명나라 영락제.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세조와 비견될 수 있는 인물이다. 정권이 안정될 때까지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그런 영락제가 즉위한 지 4년이 지난 1406년부터 자금성 건설의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만리장성 이후 최대의 역사로 불리는 자금성의 건설에는 총 15년간 100만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궁궐인 자금성은 정전인 태화전(太和殿)을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남문인 정문의 이름이 천안문(天安門)이다. 물론 현재 건물 중에는 창건 후 화재 등으로 멸실됐다가 새로 지은 것도 있다. 중국 최대 목조건물인 현재의 태화전도 청나라 순치제 때(1695) 새로 지은 것이다.

영락제는 자금성이 완성된 1421년 북평(北平)으로 천도해 ‘북경(北京)’으로 지명을 고치고, 자금성에 머물기 시작했다. 북경은 남경(南京)에서 옮겨온 새로운 북쪽의 수도라는 의미다.

자금성이란 이름은 중국의 황제, 즉 천자가 사는 궁궐로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성이라는 의미다. 하늘(우주)의 중심이 북극성이 있는 자미궁(紫微宮)이고, 땅의 중심은 바로 천자가 기거하는 자금성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곽말약 글씨의 편액 ‘고궁박물원’‘심양고궁’.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강희제 글씨 ‘중화전’ 편액.

800여개의 건물과 10m의 높은 성벽, 50m 너비의 거대한 해자(垓子)로 구성된 자금성(둘레 3천400여m)에는 1억만개의 벽돌, 2억만개의 기왓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200t 넘는 바위가 수십㎞ 떨어진 채석장에서 운반되었으며, 사천지방에서 자란 나무가 기둥으로 쓰이기 위해 4년에 걸쳐 운반되기도 했다.

이런 자금성(고궁박물원으로도 불림)에 걸린 현판 글씨는 누가 쓴 것일까. 대부분 황제들이 썼다. 건물 처마 아래 걸린 편액은 청나라 강희제가 쓴 것이 많고, 안에 걸린 것은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가 대부분 썼다.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이야기가 있는 옛懸板을 찾아서 .35·] 중국 자금성 ‘윤집궐중’
조박초 글씨의 편액 ‘백림선사’‘엄자릉조대’.



요임금 왕위 물려줄때 한 말서 유래
태화전-중화전-보화전 ‘3대전’
황제의 집무공간으로 자금성 중심
통치 철학인 ‘화목’편액에 담아

◆궁궐 편액 대부분은 강희제와 건륭제의 글씨

태화전을 비롯해 중화전(中和殿)과 보화전(保和殿)은 황제의 공식적 집무공간으로, 자금성의 중심 건물이다. ‘삼대전(三大殿)’으로도 불린다. 이 삼대전의 이름은 청나라 때 붙인 것으로, 그 편액 이름에 화목할 ‘화(和)’자를 넣어 통치철학을 담고 있다. 또한 전각 안에도 각기 국정이념을 담은 편액을 하나씩 걸어놓고 있다.

태화전에 걸린 편액은 ‘건극수유(建極綏猷)’다. 황제는 법도를 세우고 백성이 이를 편안히 여기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말은 보화전에 걸린 ‘황건유극(皇建有極)’과 서경(書經)의 탕고(湯誥)편에 나오는 ‘극수궐유(克綏厥猷)’를 합해서 만든 용어로 보인다. 극수궐유가 나오는 대목은 ‘위대한 상제(上帝)가 아래 백성들에게 치우침 없는 덕을 내려주어 그 떳떳한 성품을 따르게 했다. 그러니 그 길을 따르도록 안정되게 이끌어야만 임금의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다(惟皇上帝 降衷于下民 若有恒性 克綏厥猷 惟后)’이다.

중화전에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이 걸려있다. 진실로 중심을 잡으라는 의미이고, 서경에 나오는 용어다. 중용에도 나온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한 말 ‘하늘이 내린 차례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로 그 중심을 잡도록 하라’에서 유래한다. 훗날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는, 이 윤집궐중 앞에 말을 더 보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사람의 마음(욕정에서 나온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의리에서 나온 마음)은 극히 희미한 것이니, 정신 차리고 오직 하나로 모아 그 중정(中正)을 진실로 잡아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보화전에는 ‘황건유극’이 걸려있다. 황제가 천하의 최고 준칙을 세운다는 뜻이다. 오직 황제라야 법도나 표준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보화전의 뒤편에는 용이 여의주를 쫓아 구름 사이로 승천하는 모양을 정교하게 새긴 길이 16.57m 폭 3.7m 무게 250t의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있다. 이 바위는 50㎞ 밖의 채석장에서 캐온 것으로, 한겨울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얼린 다음 수많은 인부와 말을 동원해 옮겼다고 한다.

이 삼대전 안에 있는 편액 글씨는 청나라 건륭제가 썼다. 세 편액 모두 중간 윗부분에 작은 글씨로 ‘건륭어필(乾隆御筆)’이라는 작은 글씨와 낙관이 새겨져 있다.

건물 처마에 걸린 전각 이름 편액은 대부분 강희제의 글씨라고 한다. 강희제(1654~1722, 재위기간 1661~1722)는 ‘천고일제(千古一帝: 천 년에 한 번 나올 만한 황제)’ 또는 ‘강희대제(康熙大帝)’로 칭송받는 중국의 대표적 명군(名君)이다. 그는 중국 역대 황제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인물이기도 하다. 동기창 글씨를 좋아한 그는 글씨도 잘 써 ‘소림사(少林寺)’ ‘운림선사(雲林禪寺)’ 등 곳곳에 편액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중국 주요 문화유적의 현판 글씨 주인공은?

중국 주요 문화유적을 관광하면서 현판 글씨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몇 사람의 글씨를 중국 전역 곳곳에서 만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주인공이 자금성의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을 쓴 곽말약(郭沫若·1892~1978)을 비롯해 조박초(趙撲初·1907~2000), 강택민(江澤民·1926~)을 들 수 있다. 강택민은 중국 주석을 지낸 바로 그 강택민이다. 이들은 서예 실력과 사회적 명성을 바탕으로 곳곳의 유명 문화유적지에 편액을 남긴 것 같다.

‘고궁박물원’은 자금성의 북쪽문인 신무문(神武門)에 자리하고 있다. 유려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글씨다. 그의 글씨 편액은 시안(西安) 화청궁의 ‘화청궁(華淸宮)’ 편액, 선양(沈陽)의 ‘심양고궁(沈陽故宮)’ 편액, 둔황(敦煌) 막고굴 제2관문에 걸린 ‘막고굴(莫高屈)’ 편액 등 아주 많다.

곽말약은 근대 중국의 최고 지식인으로 시인, 역사학자, 고문자학자, 고고학자, 극작가 등으로 활동했다. 대표적 저술은 ‘중국 고대사회 연구’. 국민혁명군의 북벌(北伐)에 정치부 비서처장으로서 참가했으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중국과학원 원장 등의 요직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주로 갑골문·금석문을 연구한 그는 금석학에 대한 조예를 서법으로 발휘한 대표적 서예가이기도 하다.

그의 글씨에 대한 평은 대체로 침착통쾌하고 맑고 유창(流暢)하며, 고법(古法)을 통해 근본을 이룬 뒤 창신(創新)한 흔적이 많다는 것이다. 대소(大小)와 강유(强柔)의 적절한 조합, 기정(奇正), 허실(虛實), 신축(伸縮), 소밀(疎密) 등 서법의 여러 가지 기본요소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조박초는 오랫동안 중국불교협회장을 지내면서 불교 중흥을 위해 노력한 불교학자이자 서예가이며, 또한 정치가였다. 문화혁명 이후 사실상 금지된 불교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문화혁명 시절에는 전국 주요사찰과 불교유적이 파괴되는 것을 막고자 본인의 친필 휘호를 보내 걸도록 하기도 했다.

편액 글씨에 뛰어났던 그의 작품은 특히 전국 사찰에 많이 남아있다. 산시성 시안 화청궁의 ‘비상전(飛霜殿)’, 하북성 석가장시(石家莊市)의 ‘백림선사(柏林禪寺)’, 저장성(浙江省) 항저우시(杭州市) 부춘강(富春江)가의 ‘엄자릉조대(嚴子陵釣臺)’, 항저우 영은사의 ‘약사전(藥師殿)’, 랴오닝성 천산(天山) 대불사(大佛寺)의 ‘미륵보전(彌勒寶殿)’ 등이 그의 글씨다.

강택민은 현판 글씨 쓰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전국 유명 관광·유적지의 표석, 현판, 바위 등에 남긴 그의 필적은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모택동(毛澤東)은 기개가 있고 활달한 필치로 뛰어난 경지를 보여 명필로 인정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글씨 현판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현대의 대표적 서법가로 청나라 황족 후예인 계공(啓功)과 유병삼(劉炳森) 등의 글씨 현판도 베이징 거리 등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김봉규기자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 인기기사

영남일보TV

부동산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