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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대구의 맛있는 이야기 .7] 매운탕의 고장

2015-12-22

신천·금호·낙동 에워싼 ‘三江 도시’…매운탕 대중화의 진원지 되다

[대구의 맛있는 이야기 .7] 매운탕의 고장
대구십미의 하나인 논메기매운탕은 전라도·의성 등에서도 유명했지만 대중적 붐을 일으킨 곳은 대구시 달성군. 현재 달성군 지정 논메기매운탕 거리가 조성된 다사읍 부곡리 전경. 부곡리·문산리 등에 20여 전문 식당이 포진해 있다.
[대구의 맛있는 이야기 .7] 매운탕의 고장
메기매운탕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잉어·붕어매운탕과 찜 등으로 인해 맥을 추지 못했다. 현재 논메기는 거의 양식 민물어종의 메카인 전남 등지에서 수송돼 온다.
[대구의 맛있는 이야기 .7] 매운탕의 고장
전북 전주에서는 논메기매운탕을 ‘오모가리탕’이라고 하는데 주로 뚝배기에서 끓인다. 그런데 대구는 스텐 냄비에 탕을 끓인다. 전라도 버전이 경상도 버전보다 더 껄쭉하고 된장·들깨도 더 많이 사용한다. 경상도식은 당면이 많이 들어간다.
◆ 스토리브리핑

잘 살펴보면 대구도 ‘삼강(三江)도시’. 신천·금호강·낙동강이 에워싸고 있다. 그러니 다양한 천렵문화가 형성되고 매운탕 마니아도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육개장문화가 워낙 강세라 매운탕의 위상이 좀 미미한 것 같지만, 실은 대구가 논메기매운탕 돌풍의 진원지일 정도로 매운탕 문화가 의외로 탄탄하다. 매운탕에 칼국수가 결부된 어탕국수, 그리고 추어탕도 매운탕 문화 인프라를 풍부하게 만든다. 1946년 생겨난 대구백화점 옆 상주식당은 ‘대구 추어탕 1번지’. 들안길 ‘동수미꾸라지’도 그 한 축을 맡고 있다.

#1. 박정희 대통령과 강창 매운탕촌

역대 대통령 중 매운탕을 가장 좋아한 사람은 누굴까. 박정희 대통령이다. 1962년 2월3일. 그날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울산으로 간다. 제1차 경제개발계획이 이날 발진됐기 때문이다. 1961년 5월20일 군정 초대 대구시장에 부임한 당시 대전 2사단 참모장이던 강원채 대령은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의 첫 지방 나들이에 빠질 수 없어 새벽같이 기차를 타고 울산으로 향했다. 행사를 마친 박정희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일행들과 기차를 타고 대구로 와 잠시 회포를 푼다. 정종을 거나하게 마신 박정희. 그가 갑자기 강창(江滄·달서구 파호동) 매운탕이 먹고 싶다며 차를 대기하라고 했다. 운전석엔 강원채 시장을 앉혔다. 그런데 박정희를 더욱 기분 좋게 한 건 주인 백씨 할머니의 당당한 처신이었다. 전주의 콩나물국밥 전문식당 ‘삼백집’의 욕쟁이 할머니처럼 박정희한테 주눅들지 않았다. 그냥 음식에만 몰두하고 일행을 단순한 손님으로 봤다. 박정희는 그게 미더웠다. 박정희는 건더기에 관심이 없었다. 그냥 속풀이할 요량으로 국물만 몇 번 떠넣었다. 박정희는 원래 과식하지 않았다.


◇ 강창 매운탕촌
故 박정희 대통령도 속풀이하러 찾아
페놀사태·수질오염 등으로 쇠락의 길

◇ 유원지 전성시대
1980년대 화원·동촌·청천·하양 등엔
봄∼가을 밀려드는 손님으로 ‘호시절’

◇ 대구10味 입성
90년대 들어 ‘도심 매운탕시대’ 진입
다사 샛터마을선 논메기 매운탕 대박


2000년까지 2차례 확장 공사됐던 강창교 동단 초입 오른쪽 매운탕촌. 이제 매운탕 집은 단 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1950∼70년대 한창 때 강창에는 대구관, 대성관, 청송관, 성서식당, 이층식당 등 모두 6군데의 매운탕집이 전성기를 구가했다. 하지만 페놀사태와 수질 오염, 강창교 공사, 상습 침수, 경산 청천·하양, 화원, 동촌, 평리동 등지에 매운탕촌이 급증해 결국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할 때쯤 강창은 ‘백기’를 들고 만다. 이로써 강창은 매운탕촌으로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다.

그 와중에 강정(江亭) 매운탕 타운이 후발주자로 상종가를 친다. 백씨 할머니가 작고하면서 대구관 명맥은 가족에게 직접 이어지지 않고 고종사촌 집안으로 넘어간다. 바로 강창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강정(달성군 다사읍 죽곡리 강정정수장 근처)의 ‘경산식당’이다. 강창에는 1960년대 초만 해도 미군들이 가설해 놓은 목재 가교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낙후돼 15분 걸리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그곳 뱃사공이었던 한동호씨가 바로 대구관 백씨 할머니의 고종사촌 동생이고 그의 다섯째며느리 우명자씨에게 맛의 바통이 건네졌다. 현재 강정에는 경산을 비롯해 대구·대동·다사식당 등 4곳이 있다. 여기는 요즘 유행하는 논메기매운탕 이외에도 추억의 잉어찜 등 민물찜을 먹을 수 있다. 강창 매운탕의 맥을 잇기 위해 도심 속으로 파고든 식당도 있다. 강창 ‘성서식당’(조무순 할머니)의 맛은 현재 달서구 삼성명가타운 맞은편 ‘김정옥 매운탕’에서 꽃피우고 있다.

#2. 추억의 유명 강촌 매운탕타운

[대구의 맛있는 이야기 .7] 매운탕의 고장
1990년대 메기매운탕 붐이 일기 전 매운탕계의 스타 메뉴로 군림한 추억의 붕어찜. 특히 하양·청천·동촌·화원·옥포·강창 등 대구지역 유명 매운탕촌의 ‘귀족 메뉴’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지금은 사문진 나루터 때문에 모두 사라졌지만 한때 화원유원지 매운탕타운은 대구의 명물 중 하나였다. 낙동강의 중간 지점인 사문진 나루터. 거기에 유명 매운탕집이 많이 들어선다. 1978년 12월 화원동산이 생겨난다. 매운탕촌 전통은 50년대부터 시작됐는데 30년간 호시절을 구가한다. 화성관·대구관·향춘관 등 4집이 이 언저리의 개국공신이었고 뒤이어 화성·제일·시민·중앙·오복·국일·성주·아궁이·버들·명성식당 시대가 열린다. 2㎞의 모래사장을 가졌던 화원유원지는 봄~가을 행락객으로 몸살을 앓았다. 매운탕집은 밀려 드는 손님으로 장사진을 쳤다. 화원동산 절벽 덤바위 밑에는 민물게·다슬기 등도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1974년 포니, 78년 그라나다, 80년 봉고의 등장으로 반야월 지나 청천유원지, 하양, 동촌유원지, 옥포 용연사 옆 매운탕촌도 덩달아 즐거운 비명을 지른다. 80년대 마이카 붐은 매운탕 붐으로 이어졌다. 봉고는 인기가 최고였다. 식당 주인들은 너도나도 그걸 구입했다. 단체 손님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주인들은 10명 이상만 되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사람을 데리러 갔다. 봉고차가 없는 집은 장사를 못할 지경이 된다.

청천유원지 매운탕도 화원과 쌍벽을 이루었다. 청천은 반야월역에서 6.51㎞ 떨어져 있다. 69년 동대구역이 생기면서 빛을 본다. 당시 지역 5대 매운탕촌이 있었다. 화원·강창·동촌·청천·하양이었다. 예전엔 35번 버스에서 내리거나 청천역에서 내려 청천 포플러숲까지 10여분 걸어가야 했다. 그곳 매운탕촌은 포플러숲 안에 조성됐다. 가게는 정식 건물이 아니고 해수욕장 가건물 스타일이었다. 업소당 평균 660~990㎡(약 200~300평) 크기. 주인은 특수를 노린 외지인이었다. 한창 때는 경북·부산·대구·동서·고향·영천·사계절·현풍·하양·정인·충남 등 모두 11곳이 포진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영천식당 최기조, 현풍식당 박미옥씨가 그곳을 사수했다. 청천에서 하양 국도변에 있던 물띠미 휴게소 매운탕집(여주인 최경)은 82년 오픈했다가 이젠 커피숍으로 변해버렸다.

80년대 향어회 붐 특수를 가장 즐긴 곳은 남구 대명동 즉결재판소 맞은편 향어회타운이었다. 남지원조 등 20여 식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옥포 용연사 옆 매운탕촌도 있었지만 지금은 개발돼 ‘돌고래’만 근처 반송리로 옮겨 개업, 명맥을 잇고 있다.

#3. 대구 십미 매운탕…논메기매운탕

90년대로 접어들자 새로운 강자가 등장한다.

강촌매운탕 시대는 지고 ‘도심 매운탕 시대’가 개막된 것. 그것은 다양한 횟집의 등장과 맞물려 돌아갔다. 자연 강촌 매운탕집은 단골을 많이 뺏길 수밖에 없었다. 잉어·붕어가 논메기·민물잡어 등에 밀린다. 들안길 민물박사, 대명동 내당네거리 모퉁이 ‘금강매운탕’, 대구MBC옆 ‘강나무매운탕’, 옛 중앙상고 옆 ‘반도매운탕’, 논메기매운탕으로 체인시대를 연 ‘서재할매매운탕’, 달성군 다사읍 부곡·문산리 ‘논메기매운탕촌’, 다사읍 서재리 ‘열이네메기매운탕’, 대구의료원과 계명문화대학 사이 ‘왕실메기매운탕’, 아양교 건너기 전 아양네거리에서 우회전 ‘진메기매운탕’, 비산지하도 내려가기 전 우회전 모퉁이 커다란 간판의 메기매운탕집 옆 ‘한양매운탕’, 북구 3지구 ‘청룡민물잡어매운탕’ 등이 세몰이를 한다.

논메기매운탕은 전주에서는 ‘오모가리탕’으로 불린다. 전주에서는 뚝배기를 ‘오모가리’라 한다. 그런데 대구는 스텐 냄비에 매운탕을 끓인다.

달성군 다사읍 부곡1리 일명 샛터마을. 논메기매운탕 신화의 발상지다. 1990년대 초 거기서 손중헌논메기매운탕이 대박을 친다. 부곡리가 매운탕촌으로 들끓자 강창교 건너 죽곡리·문산리·성주대교 가도가 졸지에 ‘논메기탕 벨트’로 짜여진다. 현재 손중헌논메기·낙동·성민·대성·본향·청산·고향·도암·산정·부기·청궁·부림·다사·가마솥할매·달구벌·장수 등 20여 식당이 밀집해 있다. 이들은 작고한 경남 함양 출신 이귀달 할매가 만든 서재할매매운탕과 함께 논메기 전성시대를 개막하게 된다.

원래 손중헌씨는 1992년 무렵 사양길로 접어든 논농사를 포기했다. 3천300㎡ 넓이의 논농사를 지어 봐야 연매출액은 고작 150만원. 달성군 농촌지도소 조해옥 소장이 담수양어 시범 사업을 추천한다. 그렇게 해서 92년 6월1일 경남 창원군 대한수산 양식장 손해기 사장으로부터 8g 치어 6천마리를 구입했다. 논메기 생육기간은 약 1년6개월.

하지만 그는 마케팅에는 약했다. 궁여지책 끝에 유료낚시터로 돌파구를 찾는다. 그게 적중한 것이다. 테이블 5개를 갖춘 약 83㎡(25평)짜리 비닐하우스 매운탕집을 차렸다. 주방이 없어 버너로 매운탕을 끓였다. 영업용 택시가 입소문을 냈다. 그렇게 해서 95년 3월 부곡리 첫 논메기 전문 매운탕집 허가가 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공동기획: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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