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링타임용 드라마에 숨겨진 신자유주의 세계관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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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는 의사가 진료를 하고, 일드는 의사가 교훈을 주고, 한드는 의사가 연애를 한다는 말이 있다. 외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던 시절 유행했던 이 말은 각국 드라마의 보편적 특징을 촌철살인 격으로 보여준다. 의사 가운을 입은 남녀가 펼치는 로맨스가 한국 의학드라마의 특징이라면, 현재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SBS 월화드라마 ‘닥터스’(하명희 극본, 오충환 연출) 역시 그러한 한국 의학드라마의 맥락 속에 있는 작품이다.
‘닥터스’는 의학드라마로 가장한 로맨스 드라마이자 꽤나 잘 만들어진 킬링타임용 드라마이기도 하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가진 미덕은 시청자가 적당히 즐기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데 있다. 그러한 용도답게 이 드라마에서 특별한 문제의식이나 세계관 같은 것을 짚어보는 것은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저 1시간가량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시청하면 족할 테니 말이다.
킬링타임용 드라마답게 ‘닥터스’에서 명장면이나 명대사로 꼽을 만한 특별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꽤 잘 만들어진 장면이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이러한 장면들은 대부분 기존 영화나 드라마 속 명장면을 차용한 것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어디서 본 듯한 설정과 전개뿐 아니라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을 통해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당돌한 여의사가 깡패에게 대항하는 장면은 전도연과 박신양이 주연했던 1990년대 대표 멜로영화 ‘약속’의 첫 장면과 거의 동일하고, 빗속에서 재킷을 펼쳐 사랑하는 여자를 감싸안고 달리는 장면은 영화 ‘클래식’에서 조인성이 손예진을 감싸안는 장면과 흡사하다. 사실 이 장면의 원조 격은 ‘늑대의 유혹’에서 우산을 펼치며 이청아를 감싸는 강동원의 박력 넘치는 모습이다. 심지어 김래원이 빗속에서 흥겹게 춤추는 장면은 그 유명한 뮤지컬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진 켈리가 펼치는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이 드라마는 어디서 본 듯한 멋진 장면들을 적절히 가공해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외형적으로 꽤 세련된 드라마처럼 보이도록 만들어냈다.
굳이 이 드라마만의 특별한 점을 찾으려 한다면 여주인공의 캐릭터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새로울 것도 없는 캐릭터일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로맨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남성의 보호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닥터스’의 유혜정(박신혜)이 진화된 캐릭터처럼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일진 출신답게 걸출한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고, 고아나 다름없는 불우한 환경과 고등학교 중퇴에 소년원 출신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의사가 된 유혜정은 확실히 여타 로맨스 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다르다. 이 점으로 인해 유혜정은 남자 주인공의 힘에 기대 인생을 바꾸는 신데렐라나 캔디와는 차별된 캐릭터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유혜정의 성공은 매우 문제적이다.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할머니는 공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그녀에게 주입시키고, 열심히 공부한 그녀는 잘나가는 의사가 된다.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의심은 그녀를 성공하도록 만든 이유로 설정된다. 문제는 성공한 의사가 된 그녀의 의식이다.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거죠. 공부로 계급 이동이 가능했으니까.”(5화)라는 유혜정의 대사는 요 몇 년간 무수히 많은 드라마들이 보여주었던 대한민국의 현실,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우리 사회의 계급문제를 순식간에 지워버린다. 지금 이 사회가 과연 공부를 통해 계급 이동이 가능한 사회인가 하는 근본적 질문은 킬링타임용 드라마에서 무엇을 따지느냐는 이유로 슬며시 넘어가고 만다.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했더니 성공했다는 일진 출신 고아 유혜정의 성공담은 가난한 것은 사회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개발하지 않으려는 개인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지배체제의 논리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변화하고자 하는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이른바 자기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자유주의적 자기 개발 논리가 그녀의 성공담에 그대로 녹아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제기하는 의료민영화 문제가 예상 밖으로 지지부진하게 전개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인 자기개발 논리를 담고 있는 드라마가 의료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를 비판한다는 것은 애당초 앞뒤가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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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에 은밀하게 숨어있는 이러한 문제는 남자주인공을 통해서 또 다른 문제와 맞닿는다. 홍지홍(김래원)이 보기에 유혜정은 ‘보호 받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한’, 강한 척하는 ‘약한 여성’일 뿐이다. 여성이 남성의 품 안에서 보호되어야 할 약자로 규정되는 순간, 그 약자를 보호하는 남성은 평화를 수호하는 거룩한 사명감을 가지게 된다. 그가 유혜정의 입장과 상관없이 ‘인간 대 인간의 휴머니티’(6화)라는 말로 자신의 사랑을 거룩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이 인류 보편의 사명감인 휴머니티처럼 거룩하고 위대한 것일수록 그 사랑의 주체인 남성, 가부장제, 국가로 상징화되는 세계는 안전하고 평온한 곳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로맨스 의학드라마를 가장한 이 드라마에 숨겨진 남성중심적이고 보수적이며 신자유주의적인 세계관은, 드라마를 보면서 때론 즐겁게 때론 편안하게 시간을 때우는 사이 우리의 의식 깊숙이 우리도 모르게 침투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하다.
칼럼니스트 myvivian9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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