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의 인지가 부담이 될때
자신을 속이는 방식 택해
달콤한 약속 넘치는 선거철
새빨간 거짓말은 이제 그만
우리는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 |
| 김계희 변호사 |
‘사거리가 없다.’ 고교 졸업 이후 타지를 떠돌다 20년여 만에 대구에 왔을 때 처음인 양 마주한 놀라움이었다. 범어네거리, 황금네거리, 만촌네거리…. 그렇게 대구는 온통 ‘네거리’만 있었다. 삼거리 다음 네거리, 다시 오거리.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서수와 기수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타박하기도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닐 것이다. 위험과 결부된 곳이라 단지 동음일 뿐이라도 악착같이 ‘4’를 피하고 싶은 마음. 지금도 그런 건물들이 있기는 하지만 ‘1, 2, 3, F, 5…’ 방식으로 숫자판이 붙은 옛날 승강기가 생각났다. 4 대신 F라고 쓴다고 4층이 4층이 아닌 건 아닌데. 그런 얄팍한 속임수가 예전엔 그저 우스꽝스러웠다.
‘닥터 지바고’를 통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인간,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자 영혼이므로 타인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한 죽음이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死(사)’와 동음이라는 이유만으로 ‘4’를 ‘F’라고 쓰고, 굳이 ‘네거리’라고 고쳐 부를 만큼 평범한 인간에게 죽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두려움일 수밖에 없다. 어느 언어에서든 죽음은 가장 치열한 고쳐 부르기의 대상이 되고, 개개인에겐 고난도의 자기기만 전술이 생존의 필수방정식이 된다.
죽음만큼은 아니어도 진실의 인지가 엄청난 정신적 부담과 고통을 안겨다줄 때 대부분의 인간은 사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회피하고 변명하면서 자신을 속이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독일의 긍정심리학자 우테 에어하르트는 ‘거짓말의 힘’에서 자기기만 방식으로 달성되는 이러한 낙관편향적인 태도를 ‘성숙한 방어’라고 명명한다. 비현실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속이는 것. 이때 거짓말은 최고의 지적능력이며, 삶의 일부이고 소통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그렇다. ‘死’와 무관하다고 자신을 속일 수 있다면 F도 좋고 네거리도 좋다. ‘당신과 밥 먹기 싫어요’보다는 ‘선약이 있어요’가 모두에게 더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거짓말의 힘에 격한 공감을 보내기에 나의 직업적 일상은 너무나 많은 비도덕적인 거짓말, 자기기만들로 가득하다. 재판부를 속일 수 있다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힌 의뢰인들은 먼저 변호사를 속이려 드는데, 자신을 신뢰한 의뢰인이라고 함부로 믿었다가는 재판부는 못 속이고 참담한 결과에 변호사만 다시없는 멍청이가 되고 만다. 그뿐인가.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사람이라며 당연한 듯 예행연습을 요구하기도 한다. 모든 드라마와 영화가 그래서일까. ‘내일이 증인신문기일인데, 정말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느냐’고 ‘미리 안 만나 봐도 되냐’고 불안해 하며 물어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다들 그래서인지 어느 검사는 대뜸 “여기 나오기 전에 무슨 부탁 받았나요?”라고 증인에게 묻기도 했다. 의뢰인들만큼이나 재판부를 속일 수 있다는 자기기만에 빠진 증인들도 없지는 않으나 소위 ‘꾼’이라 하더라도 실제로 성공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직업과 무관하게 최근까지 국민 모두는 너무나도 비도덕적인 자기기만들을 목도해야 했다. 기실 낙관편향적 자기기만은 진실보다 행복을 우선적인 가치로 두고 이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비도덕적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들에게는 필요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당면한 고통을 최소화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일는지도 모르겠다. ‘엮은 것’이라고 했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했다. 물론 이러한 말들이 거짓말이었다는 진실을 외면하고 싶고, 그러한 자기기만이 덜 고통스러운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비도덕적이라고 마냥 비난할 수도 없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당시 최고의 거짓말이야말로 집단적인 낙관편향적 자기기만이었고 그 거대한 거짓말의 힘은 누군가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바야흐로 다시 선거철이다. 네거리마다 대형 현수막이 가득하다. 낙관지향적 자기기만을 불러일으키는 달콤한 약속들도 넘쳐난다. ‘빨간 맛’이 김정은조차 매료시켰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빨간 맛을 우리 모두는 너무 많이 맛보았고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여성칼럼] 자기기만의 새빨간 거짓말](https://www.yeongnam.com/mnt/file/201804/20180405.010300816420001i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