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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 속 시인 마종기·가수 현미·채현국 이사장 등에 ‘희망의 빛’

2018-06-26

6·25전쟁 중에도 청소년에 배움의 길 ‘서울피란대구연합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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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서울피란대구연합중학교 학생들 모습. 대구연합중은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 온 학생들을 모아 개교한 학교로, 13개 학급에 2천425명의 학생들이 다녔다.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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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자로 지은 대구연합중학교의 교실. <대구교육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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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서울 피란대구연합중에 다닌 마종기 시인이 영남일보에 발표한 시 ‘우리 학교’.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마 시인은 지금도 이 시를 습작한 노트를 갖고 있다.

‘우리학교는 서울 피난 학교다/ 쓰러져 가는 하꼬방 집이다/ 겨울엔 창문으로 무섭고 찬 바람이 불었다/ 그렇다/ 배움에 끓는 학도들은/ 연상 손을 호-호 불면서 공부를 했다/ 앞날의 희망을 보고/ 쓰라린 고통도 잊은 것이다…(하략)’

<마종기 ‘우리학교’에서>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당시 중학생이던 마종기 시인은 영남일보에 ‘우리학교’라는 시를 발표한다. 소년 마종기는 그때 그 시절 피란학생의 고단한 삶을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러면서 ‘앞날의 희망을 보고 배움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다짐을 시에 담았다. 당시 마종기는 아버지인 아동문학가 마해송을 따라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하고 있었다. 마해송은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화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쓴 작가로, 당시 공군종군문인단 단장을 맡고 있었다. 마종기가 시에서 그려낸 ‘우리학교’는 서울에서 대구로 피란 온 학생을 위해 개교한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였다. 이 학교는 전란 중 피폐함 속에서도 배움의 길을 잇게 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며, 지금도 한국 교육사에 명징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대구로 몰려든 피란 서울학생

6·25전쟁이 일어나자 대구에는 40여만명의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피란살이는 혹독하고 참혹했다. 구호물자는 넉넉지 않아 생계조차 막막했다. 무엇보다 피란 학생의 교육이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대구는 전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학교 건물을 군에서 사용해 교육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 학생까지 수용할 여력은 당연히 없었다. 보다 못한 교사들은 노천수업으로 대신했다. 칠판을 걸 수 있는 나무가 있고 아이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만 있으면 그곳이 ‘학교’였고 ‘교실’이었다. 1951년 4월23일 뉴욕타임스는 당시의 모습을 전 세계에 이렇게 타전했다.

‘학생들은 교외 어떤 산 위에서, 옛 일본 신사에서, 개천에서, 그리고 산골짜기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남한의 어디를 가든지, 정거장에서, 약탈당한 건물 안에서, 천막 속에서, 그리고 묘지 부근에서 수업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1951년 봄 부산에서 피란 학생을 위한 학교가 속속 들어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 대구에 머물던 서울시 교육 관계자들도 곧바로 ‘작업’에 나섰다. 이들은 당시 달성군청에 있던 서울시 연락사무소에서 회의를 열고 대구 피란학교 설립을 위한 본격적 논의에 들어갔다. 정부도 팔을 걷었다. 그해 6월21일 백낙준 문교부 장관은 한국 학생의 교육재건을 위해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우리는 도움이 절실하다”며 미국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의 탄생

정부와 교육관계자의 노력은 얼마 후 결실을 봤다. 1951년 9월20일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이하 대구연합중)가 마침내 문을 열었다. 학교는 대구 중구 남산동 옛 일본 육군 관사 자리에 들어섰다. 미국의 교육시설 원조계획(CAC 원조계획)에 따라 임시 교실이 지어졌다. 공식 인가된 학교였다. 하지만 교실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은 판자로 얼기설기 지은 ‘하코방 교실’에서 한여름 폭염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했고,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와 맞서야 했다.

당시 대구연합중 2학년이던 채현국 양산 효암학원 이사장은 “판자로 만든 교실은 그나마 좋은 편이었다. 어떤 교실은 천장만 있고 옆이 뻥 뚫려 있었다. 책상도 없이 긴 판자때기에 앉아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대구에서 발행된 학생 잡지 ‘학원’은 창간호에 대구연합중 탐방기를 실으며 “하코방 교실에서 글을 배우고 있는 이 나라 학생들의 모습은 눈물겹다. 배움이란 이렇게도 소중한 것이며, 전쟁이란 이렇게 처참한 것인가”라고 묘사했다.


피란민 40여만명 대구에 몰려
부산 피란민 학교 개교 소식에
대구거주 서울교육관계자 논의
1951년 옛 日육군관사자리 개교
판자로 대강 지은‘하코방’교실
교실 하나에 110명 넘는 반도
“힘든시절 학교갈때 가장 좋았다”
종전 후 1954년 3월31일 문닫아



대구연합중 규모는 13개 학급, 학생 2천425명(중학부 1천383명, 고등부 1천42명)이었다. 서울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북한 출신도 적잖았다. 입학 절차는 단순했다. 간단한 면접만 보면 됐다. ‘너 서울 어느 학교 다녔어? 국어 선생님 이름이 뭐였어?”라는 질문에 그에 맞는 답을 하면 바로 입학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행정적인 증명서류를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교사는 모두 51명. 이들 역시 서울지역에서 교편을 잡다가 대구에서 피란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더러는 북에서 내려온 교사도 있었다.

채 이사장은 “교실이 턱없이 부족해서 110명 넘는 반도 있었다. 판자 의자 하나에 4~5명씩 20줄에 앉아 수업을 받았다. 그래도 선생님의 열의는 대단했고 학생은 배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고 말했다. 피란학교는 여느 학교처럼 교가도 있었다. 교가의 노랫말은 대구에 머물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붙였다.

‘팔공산 높은 봉은 백두산 줄기/ 삼각산 큰 기상을 여기서 본다/ 자유 찾아 남쪽 하늘 먼길에 모여/ 큰 고난을 양식 삼아 뜻을 기른다/ 온 겨레 건지려는 맹세 속에서/ 그 이상 드높구나 대구연합중고등/ 연합중학 연합고등 거룩한 이름 길이두고 우리마음 거울이 된다’.

◆피란 학생들이 말하는 ‘그때 그 시절’

피란 학생들에게 대구연합중은 ‘희망의 빛’이나 다름없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배움의 끈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것. 평양 정의여중을 다니던 가수 현미는 1·4후퇴 때 피란 와서 대구연합중을 다녔다. 그는 “가족 12명이 초가 단칸방에 살았는데, 장사 나간 엄마 대신 동생들 돌보고 집안일도 도맡아 했다. 힘든 피란살이였지만 학교 갈 때가 가장 좋았다. 하지만 등교 때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두 살, 다섯 살짜리 어린 동생들을 상다리에 묶어 놓고 나와야 했다”며 아픈 기억을 끄집어 냈다. 현미는 대구연합중 2학년 재학 중에 김백봉무용연구소에 들어가 ‘꽃초롱 오페라’ 단원이 되었고, 이후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재 미국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는 마종기 시인은 “대구연합중 시절이 작가가 된 계기였다”고 했다. 그는 “국어시간에 배운 세계명작에 흠뻑 빠져 글을 쓰게 됐다. 그때부터 잡지나 신문에 글을 투고했고 작가의 꿈을 꾸게 됐다. 방과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영남일보 신문을 팔았다. 책보에 신문 20장 정도 돌돌 말아 들고 ‘내일 아침 영남일보’를 외치며 대구역 앞을 뛰어다녔다”고 회상했다. 채현국 이사장은 “아홉 끼를 굶어 학교에서 쓰러진 적도 있다. 그때마다 배곯는 제자들을 보듬어준 분이 당시 국어 담당이었던 김소영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자기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가 자기 식구 먹을 밥까지 내주셨다. 피란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 대구연합중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피란 대구연합중학교’는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3월31일 문을 닫았다. 지금도 이 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교가를 잊지 않고 흥얼거리며 그때의 기억을 가슴 한 편에 새겨 두고 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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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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