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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단상] 나쁜 기억은 왜 오래갈까?

2020-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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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뇌과학자들이 말하는 공부 잘하는 방법은 문제를 많이 풀어보라는 것이다. 텍스트를 붙잡고 반복해서 보는 것은 기억을 장기적으로 저장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막상 시험을 볼 때는 기억을 되살리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본 것 같은데 머리를 맴돌며 기억이 살아나지 않는 경험을 다들 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기억의 인출이 잘 안 돼서 그렇다. 기억의 과정에는 저장과 인출이 중요하다. 반복해서 암기한다면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저장을 하는 것이고, 문제를 풀어본다는 것은 저장된 기억을 반복적으로 인출을 하는 것이다. 인출을 하는 과정이 반복되어야 기억이 더 단단해지고 꺼내는 과정이 쉽다. 이런 과정을 '재응고화'라고 부른다. 반복적으로 단단하게 만든다는 뜻이다.

이런 뇌의 작용이 뜻밖에도 잊고 싶을 정도의 나쁜 기억을 더 안정시키고 강화하는 작용을 한다. 우리는 나쁜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더 또렷해진다. 주위에서는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그러냐며 타박을 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불현듯, 심지어 생생하게 떠오르니 그게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인 모양이다. 그런데 몇 달 전에 화가 났던 일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왜 수십년 전의 어떤 기억은 더 또렷해지고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것일까? 감정이 실린 사건은 분명히 장기기억으로 잘 넘어가기는 한다. 그러나 공부할 때처럼 인출의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그 기억은 점점 흐려지지만, 인생의 몇몇 특정사건은 뜻하지 않게 반복적으로 인출을 하게 된다.

요즘 한 드라마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자동적으로 인출을 하고 있는 듯하다. 가까운 과거일은 물론이거니와 10년도 더 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잠을 못 자고 분노를 느껴 진료를 받으러 오는 경우가 있다. 배우자의 외도나 성추행 및 폭행 등의 기억은 이렇게 드라마·영화·뉴스와 같은 미디어 매체에 의해 수없이 반복되며, 미디어가 아니더라도 친구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가도 이런 이야기가 튀어나오면 고통스럽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이렇게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기억의 인출작업이 반복되다 보니 고통스러운 기억은 흐려지기는커녕 더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냥 어쩔 수 없이 고통을 누적시키며 인생의 후반으로 갈수록 비참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다행히도 시간과 우리 뇌는 회복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점점 감정에 무뎌지면서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로 받아들이고 현재를 살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서 우울증이 있거나 불안감이 심한 사람은 자연적인 회복이 잘 안 된다. 그래서 고통을 누적시키면서 과거를 계속 곱씹으며 분노하고 사는 사람들이 주위에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복수를 하면 좀 나아질까? 복수는 일시적인 쾌감을 불러올 수는 있지만 기억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법적인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 기억을 더 또렷하고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다.

이들에게 과거를 잊으라는 말은 홍수로 침수된 논에서 컵 하나 쥐여주고 물을 퍼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가만있을 수는 없다. 이제부터 고통스러운 과거조차도 나의 일부분임을 인정하자. 또한 좋은 기억도 여러분이 인출을 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밝은 점을 쳐다보고 살자. 물론 어렵고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행복을 찾는 일은 지난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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