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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일보TV

[이영란의 스위치] 이주강 前 한국서각협회 이사장, "서각은 무상무념의 종합예술…평정심으로 칼 들고 각에 임해야"

2021-06-16

이주강
미목 이주강 서각가는 "편견으로 냉대 받던 서각이 꾸준한 학습과 실기를 통해 차츰 인정받게 되었다"며 "앞으로 서각문화재 보수 복원 제작을 위한 국가공인 자격증을 인정받고 관리하는 업무를 위탁받음으로써 서각이 한층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미목 이주강(전 한국서각협회 이사장) 서각가는 전통 속에서 분명히 살아 있으나, 나무에 뭔가를 새기는 기능 정도로 취급받으며 존재감이 없던 서각(書刻)을 예술영역으로 당당히 대접받게 만든 서각계의 최고 원로다. 1960년대 효성여대 학보사를 거쳐 영남일보 편집부에서 근무하다 육아를 위해 퇴사한 이 전 이사장은 10여 년의 경력단절 끝에 서예를 배우며 각(刻)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많은 이의 편견으로 냉대를 받았지만, 함께 시작한 동료와 함께 서각(書刻)이라는 용어를 세우는 등 40여 년간 쉬지 않고 실력을 연마하고, 제자들을 정성으로 길러내 뭇사람의 인식을 바꿔 놓았다. 이 전 이사장이 구심점이 된 대구·경북 서각계는 회원 수와 실력면에서 타 지역을 압도하면서 대한민국 서각계를 주도하고 있다. 서울 수운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서각대전 심사장을 찾은 이 전 이사장을 5일 인터뷰하고, e메일·전화통화 등을 통해 보충했다.

서체·목재 등 선택에 '고뇌의 시간'
옛 현판 보수·복원하고 목판 재현도

30대 중반에 서예 배우며 서각 심취
천대·수모 감내하며 40여년간 외길
기능서각 편견 딛고 예술 인정받아
전통 계승과 대중화에 최선 다할 것


▶서각은 어떤 예술인가.

"서각이란 '글씨를 새긴다'는 뜻으로 활자가 생기기 전부터 나무나 돌, 거북의 등, 동물의 뼈 등에 새겨 보존되고 이어져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우리 민족과 선조들의 얼이 깃든 궁궐·사찰, 전국에 산재한 서원의 현판과 편액·주련 등을 보수 복원하고, 삼국유사나 팔만대장경 등을 목판으로 재현시키는 등으로 전통서각의 맥을 잇고 있다. 요즘은 순수서예나 서각의 흐름을 과감히 탈피하고 글씨와 각을 조형적으로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현대서각 인구도 많이 늘고 있다."

▶어떻게 입문했나.

"홀시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30대 중반쯤에 서예학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초등생 아들과 함께 계헌 이상태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하면서 서각을 접했는데 마치 '신세계'를 본 듯 심취하게 되었다. 서각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는데 계헌 선생이 홀연히 사라지셨다. 서각에 대한 갈증으로 수소문 끝에 청사 안광석 선생을 만나게 되었고, 다년간 서울을 오가며 전통 서각의 진수를 오롯이 사사하는 행운을 얻었다. 그리고 1979년 미목서각연구실을 개원했다. 작업공간을 마련하려고 연구실을 열었는데 작품에 대한 입소문이 나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어떤 매력에 끌렸나.

"서각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을 못한다. 전각이 서예의 꽃이듯 서각은 전각을 포함한 종합예술이다. 그냥 글씨를 새기는 것이 아니다. 서각을 하기 위해 먼저 하고자 하는 작품내용을 선택하고 자전을 참고해 서체를 정한 후 배자(配字)하여 글씨를 쓴다. 그리고는 어울리는 목재에다 각을 한다. 이 모든 과정을 준비하는 동안 많은 고뇌와 시간과 노력이 더해진다. 하지만 몰입하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없고 심지어 배가 고픈 줄도 모른다. 한자리에 앉아 한 작품을 하기 위해 몇 날을 매달린다. 그런데도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으로 일을 하다 보면 즐겁고 행복하다. 어떤 이는 서각을 노동이라 여긴다. 왜 이리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묻는데 그럴 땐 그저 웃음으로 답한다."

▶자신의 서각작품 특징을 설명하면.

"자필 자각으로 주로 갑골문·전서 등을 작품화해왔다. 암각화에 새겨진 갑골문은 서각의 근본이 되는 각본으로 서각인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내 작품이 고급지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데 그것은 채색 방법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구리(銅)를 부식시켜서 나무채색에 쓰는 데 나만의 세계가 있다. 한 작품에 세 가지 이상의 색깔을 쓰지 않으면서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나무 채색 과정에 많은 정성이 필요하다. 그것이 시골에 사니까 가능할 수도 있다. 채색할 때 온도 습도 조절이 매우 중요한데 천연염색하듯 시간과 공을 들인다."

▶서각이 예술 영역으로 자리잡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

"서각은 오랫동안 한낱 기능으로만 치부되었다. 정말 좋아하는 서각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많은 수모와 서러움을 감내해야 했다. 기능서각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될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일념으로 작업했다. 1985년에 미목서각회를 설립하고 창립기념일 전후 격년제로 전람회를 하고 있다. 1992년에는 한국미술협회 대구지회에서 개최하는 서예대전(제12회)에서 전국에선 처음으로 서각 공모전이 개최되었다. 이후 각 공모전에 서각이 확산했다. 계명대 미술대학 서예과에서 서각특강을 시작으로 1997년 대구예술대 서예과에서 전국에서 최초로 학점이 인정된 서각을 강의했다.(1997~2009) 그러나 불행하게도 전국의 각 대학에서 서예과가 폐과되면서 대학교에서의 서각 강의는 끝났다. 하지만 각 대학 사회교육원과 문화단체 등에서는 서각학습이 꾸준히 이어지고 서각 수준도 향상되고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한 번은 대학원 은사였던 서경보 선생에게 각을 하기 위해 어려운 한자문장 공부를 청했더니 천민이 하는 것이라며 "대학에서 강의를 줄 것이니 그만두라"고 했다. 전형적인 경상도 사나이인 남편은 "여자는 살림이나 잘하면 된다. 취미로 헬스 클럽을 다니라"며 처음부터 반대했다. 오기가 났다. 혹시 책이라도 잡힐까 빈틈없이 살림하면서 회원들과 작품을 열심히 했다. 미목서각회원전을 처음으로 1987년 대구백화점 전시실에서 열어 빅히트를 쳤다. 이문열 소설가 등 많은 유명인이 대구까지 관람 오니 대구백화점 측에서 전시회를 1주일 연장할 정도였다. 그제야 서각 입문을 반대했던 은사인 서경보·심재완 박사가 "자네에게 졌네"하셨고 이후 많이 도와주었다. 반대했던 남편은 서예·서각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대구에 있으며 전국 조직을 관할하는 한국서각협회 이사장 활동도 했는데.

"자리 욕심이 없는데 떠밀리다시피해서 출마했다. 심부름꾼이다 생각하고 봉사했다. 협회의 묵은 난제를 해결하고 단임 임기를 마치고 물러났다. 대구 출신인 후임 이사장이 훌륭하게 일을 해주고 있다."

▶각(刻)이 격리가 많은 코로나 시대 특히 좋은 예술인 것 같다.

"그렇다. 서각은 '도(道)'라고 규정할 수 있다. 서각가의 손을 거치면 쓸모없는 나무도 예술품으로 되살아난다. 평정심으로 칼을 들고 나무를 대하고, 각에 임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을 늘 체험하고 있다. 지금 내 나이 팔십을 바라보는데 친구 대부분이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고, 심심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것이 없다. 서각을 하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앞으로의 계획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무상무념의 서각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남은 세월도 서각 속에 묻혀 살고 싶다. 서각은 평면적인 서예보다 입체감이 있고, 또 다양한 색상으로 분위기를 돋우는 미술적인 요소, 회화에서 느끼지 못하는 설치작업까지 가능해 독자적인 예술의 한 장르로 독립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중독성 습관으로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오늘도 책을 본다. 자전을 뒤적이고 집자하고 붓을 잡고 각도를 잡는다. 우리 전통 서각의 소중함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한편 서각의 대중화를 위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논설위원 yrlee@yeongnam.com>

◆이주강 서각가= △1943년 대구 출생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미목서각연구실 대표(현) △대한민국 서각대전 초대작가 심사 운영위원장 △국제각자연맹 부회장 △국제각자예술공모대전 초대작가 심사 운영위원장 △대한민국 미술대전 운영 심사위원장

◇주요 작품= △법보종찰 가야산 해인사와 해인사 성보박물관 대비로전 등의 현판·주련 약 50점 △달구벌대종 현판, 사천시민대종각 상량문 △박정희 대통령 생가 현판 △동화사 파계사 성전암 현판 및 주련 다수 △삼성현 역사문화공원 역사문화관 내 '원효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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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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