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절해고도 유배지
제주에 위리안치되어 생활
유배 중 학문과 창작에 몰두
현지인들의 삶을 시로 남겨
귤림서원에 五賢으로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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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유영 제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
조선 중기 문인인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도 그중 하나다. 동계는 한강 정구와 내암 정인홍을 사사했던 인물로, 불혹을 넘긴 나이에 관직에 진출하여 광해군 및 인조 연간의 내우외환 속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선비다. 그가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1614년 광해군에게 올렸던 '갑인봉사(甲寅封事)' 때문이다. 그는 이 상소에서 선조의 적장자였던 영창대군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에 대한 강한 처벌을 주장함으로써 광해군의 분노를 사 머나먼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았다.
동계는 비슷한 시기 제주로 유배를 와 바둑과 거문고로 답답한 마음을 달랬던 송상인과 이익과는 달리, 유배 생활 중에도 항상 글을 읽으며 공부에 몰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주의 날씨와 풍토는 육지와는 달라 그를 매우 힘들게 하였고, 늘 고향의 모친과 처자식을 그리워하였다. 그러한 까닭으로 '황혼에 달을 보고(黃昏見月)'라는 시에서 그는 "대발은 성기고 차가운데 달빛이 비껴들고/ 수심 어린 사람을 쫓아 하얀 머릴 비추네/ 오늘 밤 고향에선 응당 저 달을 함께 보고/ 아내와 아이들은 하늘 끝 바라보며 눈물 흘리겠지"라고 노래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유배형을 받았던 많은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에게도 죽음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우연히 짓다(偶成)'라는 작품에서 그는 "북쪽에서 오는 소식은 모두가 겁이 나/ 밤엔 등불로, 낮엔 돈을 던져 점을 치네/ 죽고 사는 것 오로지 도외시할 줄 알기에/ 술에 의지하여 애타는 마음을 풀어 보련다"라고 노래하였다. 적소(謫所)의 죄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 두려움과 이러한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술에 의지했던 동계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한평생 강직하게 살았던 동계 또한 유배지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가진 한 명의 인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동계는 유배 생활 속에서 현지인들의 삶을 관찰하고, 이를 시로 남기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가난한 여인의 노래(貧女吟)'다. 이 시에서 그는 "흰옷 입은 가난한 여인, 모습이 말이 아닌데/ 등불 아래 바늘 들고 옷을 꿰매네/ 밤이 깊도록 졸면서 옷을 풀지도 못하고/ 아침이면 좁쌀을 빌려 또 방아를 찧어야 하네"라고 노래하여 현지인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었다.
이후 동계는 약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육지로 돌아간 이후에도 제주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았던 것 같다. 17세기 중반에 세워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우암 송시열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배향됨으로써 제주지역의 사표로서 오랫동안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조유영 <제주대 국어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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