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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직터뷰] 서광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명장 "혁신적 사고 위해 스스로 채찍질…장치산업엔 대충이 있어선 안 돼"

2023-04-12
[논설위원의 직터뷰] 서광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명장 혁신적 사고 위해 스스로 채찍질…장치산업엔 대충이 있어선 안 돼
포스코 서광일 명장이 전기강판 코일의 품질을 확인하고 있다. 〈포스코 제공〉
명장(名匠). 뛰어난 기술로 이름난 장인을 뜻한다. 한마디로 특정 분야에서 최고라는 이야기다. 명예로운 이 타이틀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생이 뒤따랐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아마 숱한 피땀 아래 고뇌와 좌절을 반복했을 것이다. 외롭고 고된 길을 뚜벅뚜벅 걸어야 했던 과거는 무척 힘들었겠다는 짐작만 가능하다. 하지만 명장 반열에 오른 사람들 대부분은 지금까지의 과정을 설명할 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풀어낸다. 세월의 무게까지 컨트롤하는 듯한 노련함과 여유도 느껴진다. 글로벌기업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서광일(60·압연설비 1부 설비안전섹션) 명장도 그렇다.

[논설위원의 직터뷰] 서광일 포스코 포항제철소 명장 혁신적 사고 위해 스스로 채찍질…장치산업엔 대충이 있어선 안 돼
서광일 명장이 자신의 업무와 포항제철소 41년 근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기태기자

◆흙수저에게 포항제철소는 운명이었다

서 명장은 포항 북구 송라면 조사리 출신이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그리 넉넉지 않았던 가정형편 때문에 송라중 졸업을 앞두고 일찌감치 이공계 고교 진학을 염두에 뒀다. 어업에 종사했던 부친이 오랫동안 원인 모를 병을 앓았던 탓에 철들 무렵부터 '실질적 가장'이라는 생각을 하고 책임감을 짊어지게 됐다. 부친은 총명했던 아들이 대학까지 학업을 이어가기 바랐지만 집안 사정을 뻔히 아는 서 명장은 그럴 수 없었다. 때마침 중3 때 운명처럼 포철공고 1기 모집공고가 떴고 부친에겐 비밀로 한 채 원서를 냈다. 학비 부담이 없었고 졸업 후 입사가 보장된다는 점은 당시 그가 그릴 수 있는 최고의 그림이었다.

가난했지만 정신적 지주였던 부친은 결국 고2 때 먼 길을 떠났다. "아버지는 병명도 모른 채 돌아가셨다. 내가 번 돈으로 큰 병원을 찾아다니며 낫게 하고 싶었다. 진심이었고 간절했다. 가진 게 없었어도 가르침은 큰 분이셨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했고, 특히 모임에 초청을 받아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서 명장은 이 말을 유언처럼 가슴에 새기며 지금까지 모토로 삼고 있다. 실제로 그는 선후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소통을 했고, 무엇이든 배우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런 자세는 훗날 그가 명장으로 선정될 때 빛을 발한 대목이기도 하다.

◆입사 41년...소통과 열정으로 일궈낸 명장

1982년 4월1일. 포철공고 1기 졸업생 서광일은 꿈꿔왔던 포스코맨이 됐고 1차 공장에 배치됐다. 지금은 공정이 첨단화·세분화되고 설비 자체가 워낙 다양하고 많아 소속부서나 근무지가 구체적이고 복잡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누가 '어디서 일하냐'고 물으면 답이 간단했다. 1968년 출범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1973년 포항 1기 설비종합준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생산을 시작했다. 서 명장은 포항제철소가 탄력을 받을 시기에 포스코와 인연을 맺었고 그렇게 41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매사 적극적이고 성실함이 돋보였던 그는 입사 7년 만에 자취 집 주인의 조카였던 4살 아래 권양미씨와 중매결혼을 했다. 든든한 조력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며 또 다른 에너지를 얻은 서 명장은 부인을 '이쁘고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학습과 탐구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현장에서 설비를 이해하기 어렵다면 기계설계자의 생각과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서 명장의 지론이다. 일본기술자들과의 협업이 많았던 시절에는 한동안 일어 공부에 매진했다. 냉연설비와 관련, 문서와 도면을 펴놓고 일을 하는데 시쳇말로 까막눈이어서 너무 답답하고 아쉬웠다. 본인의 노력과 회사의 지원에 힘입어 그는 미친 듯이 공부했고 일본기술자들이 알려주지 않거나 비밀로 하는 내용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기를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실적을 내면서 존재감을 부각시키던 그는 2017년 명장(전기강판 ZRM 압연기 Hybrid ACG제어기술)의 반열에 오른다. 포스코는 기능장 보유자 가운데 테크니컬 레벨을 충족한 기술자들을 대상으로 명장을 선정한다. 2015년 도입된 명장제도는 기술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성을 포함한 동료들의 평가 역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소통과 협력을 중요시하던 그의 명장 선정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철강 명장' 열정과 소통의 41년
"현장설비 이해하려 일본어 공부 몰두
일본이 숨기려 했던 기술까지 알아내
원리원칙 지켜야 훌륭한 기술자라던
박태준 회장의 격려·주문도 큰 힘 돼"

침수 때 실감한 '위기극복 DNA'
"경영진 판단·사원 단결력 감명받아
공장정상화 위해 헌신하는 모습 보며
MZ세대 후배에 대한 선입견 무너져"

◆근면·성실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서 명장은 고(故) 박태준 회장과 현장에서 홀로 마주한 적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수행원도 없이 냉연공장을 찾았을 때 그는 작업 중이었다. 이런저런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았던 그날, 박 회장은 그에게 "장치산업에서 대충이나 대강이 있어서는 안 된다. 원리원칙을 제대로 지켜야 훌륭한 기술자가 되고, 나아가 포철도 발전할 수 있다"고 주문한 뒤 격려해 주셨다고 전했다. 선견지명이 탁월했던 박 회장을 존경한다는 서 명장은 "돌이켜보면 그날의 격려와 주문이 큰 힘이 됐다. 사고의 폭이 넓어졌고 스스로 채찍질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일개 전기기술자지만 기계나 금속도 알아야 제철소를 제대로 돌릴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들려줬다.

'하루에 1가지는 배우겠다'는 의지는 현재진행형이다. 명장이 된 이후 회사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진 것도 자기계발과 애사심에서 비롯됐다. 오전 8시 출근이지만 오전 5시30분~6시쯤 집을 나선다. 아침 준비 때문에 덩달아 새벽잠을 설치기 일쑤인 아내에게는 미안한 부분이다. 자체 정비와 함께 현장근무자들과 소통하면서 이곳저곳을 살피는 게 주된 일과다. 그에게는 부지런히 현장을 다니며 깨달은 보물 같은 믿음이 있다. '기계는 손이 많이 가면 고장이 안 나거나 덜 난다.'

◆'영일만의 기적'...안 되면 되게 하라

지난해 9월 인근 냉천이 범람하면서 포항제철소는 악몽 같은 상황을 겪게 된다. 포항을 덮친 태풍 힌남노의 영향으로 공장이 물에 잠기면서 고로의 불이 꺼진 데다 변전소 기능이 멈추면서 암흑천지로 변하는 등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최대 170t에 달하는 압연기용 메인모터 30~40대를 1년 이내 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당시 국내외 전문가들의 진단이었다. 그러나 명장들을 중심으로 뭉친 포스코 50년의 저력과 경영진의 현명한 판단은 끝내 '135일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정말 앞이 캄캄했죠. 솔직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이 안 났습니다. 돌이켜보면, 기적이 가능할 수 있었던 첫 번째 신의 한 수는 경영진의 '전원 차단 결정'이었습니다. 폭발이 일어나면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때문에 기적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복구대책을 고민하던 중 일본의 쓰나미 피해가 떠올랐고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던 일본기술자들과 논의를 하면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서 명장은 사투를 벌이면서 포스코의 위기극복 DNA를 실감했다고 했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단결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특히 MZ세대 후배들에 대한 선입견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덧붙였다. 이기적일 것으로 지레짐작했던 예단은 공장 정상화를 위해 놀랄 만큼 헌신하는 그들의 자세 덕분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현장을 신뢰하는 경영진의 끊임없는 소통과 지원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큰 힘을 실어줬다.

'빠르게보다는 안전하게'라는 포항제철소 캐치프레이즈 아래 현장을 누비는 그는 "어떤 지시나 현안을 접했을 때 대안 없는 반발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조직에도 도움이 안 된다"면서 "후배들을 교육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솔선수범한다는 자세로 하다 보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가 밝힌 만 41년 직장생활의 소회는 간단명료했다. "힘들었지만 포스코와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장준영 논설위원 changc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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