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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
홍준표 대구시장은 '그랜드 대구'라고 칭했다. 대구광역시 군위군. 1995년 달성군이 편입된 이후 28년 만에 대구 지도가 바뀌었다. '양(量)질(質) 전환의 법칙'(Quantity becomes Quality·프리드리히 헤겔)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로 이행된다. 그렇다고 모든 양적 충족이 질적 비약을 가능케 하지는 않는다. 지금은 더 넓어진 여백에 상상력을 덧입힐 시간이다. '그랜드 대구'를 '그랜드 디자인'할 적기다.
군위군 청사 일대는 온통 축제 분위기. 축하 현수막과 깃발이 여기저기 나부낀다. 군위군 읍·면을 부지런히 오가는 대구행 9번, 9-1번 급행 버스가 변화를 실감케 한다. 군위(614㎢) 편입으로 대구의 면적은 1천499㎢. 인천(1천66㎢), 울산(1천62㎢)을 제치고 전국에서 가장 넓은 특·광역시로 등극했다. 부산(770㎢)의 곱절, 서울(605㎢)의 2.5배에 달한다. 행정구역도 1읍·7면이 추가돼 7구·2군·7읍·10면·133동 체제로 개편됐고, 인구는 2만3천219명이 더해져 238만251명으로 늘어났다. 예산 규모는 4천억 원이 보태져 16조8천682억 원이 된다. 농업인구는 14% 증가한 5만9천183명으로 광역시 중 가장 많고, 경지면적(6천917→1만3천784㏊)과 농정규모가 2배 가까이 증가했다. 땅이 넓어졌고, 사람이 많아지고, 예산과 자원이 풍부해졌으며, 산업이 다양화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대구의 경쟁력과 미래 동력이 그만큼 더 커졌음을 뜻한다. 군위는 분명 기회의 땅이다. 홍 시장도 "대구 재도약을 위한 담대한 여정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했다.
대구의 미래를 디자인할 '담대한 여정'의 초입에서 대구의 역사를 돌아보는 건 역설적이다. 자부심 가득한 대구의 역사가 우리가 설계할 미래의 좌표를 보여준다. 며칠 전 찾은 대구근대역사관(중구 포정동). 그곳 모든 사료는 대구 너머 대한민국 근현대사로의 시간여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시 확인하며 놀랐지만, 대한민국 역사의 중심에는 늘 대구가 있었다. 팔공산 동화사가 항일 의병의 거점이었고 대동청년단·조선국권회복단·대한광복회·비밀결사 혜성단 등 숱한 애국 단체의 근거지가 대구였다. 국채보상운동과 3·1만세운동, 유림단의 파리장서운동, 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상업학교의 동맹 휴학, 대구 철시운동 등은 대구의 기개와 애국심을 널리 알린 거사였다. 6·25전쟁 중 임시수도로서 낙동강 최후 방어선을 목숨 걸고 지켰으며, 그때 하루도 휴간 없이 전황을 알린 전국 유일의 신문이 구상(具常·편집국장 겸 주필) 주도의 영남일보였다. 최초의 민주화운동으로서 4·19를 촉발한 2·28 민주운동은 대구의 자랑스런 뿌리 정신이 됐다. 선교사에 의해 처음 심어진 사과나무(1899년)가 훗날 '대구 사과'로 각광 받았고, 뽕나무·면화·대마 재배에 적당한 풍토는 '섬유 도시 대구' 탄생의 토대가 됐다. 1910년대 후반 우리 자본으로 동양염직회사가 설립되고, 광복 후에도 삼호방직·제일모직·한국나일론 등이 잇따라 세워지면서 '섬유 도시'는 비상했다. 조선 3대 시장으로 유명한 서문시장, 최대 약재시장 약령시장을 중심으로 근대 상업도시의 면모도 일찌감치 갖췄다. 무엇보다 1938년 이병철이 서문시장 인근 수동(인교동)에 자본금 3만 원으로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이후 삼성물산·제일모직을 창립,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됐다. 그것이 대한민국을 산업화, 초일류 정보화 사회로 견인했다. 박정희와 이병철 그리고 대구는 조국 근대화·산업화를 이끈 3두 마차였다. 어디 이뿐인가. 이육사·이상화·백기만·이장희·이호우·현진건·오일도·박목월·조지훈 등이 대한민국 문학의 금자탑을 세웠고, 박태원·박태준·현제명 같은 쟁쟁한 음악가가 배출됐다. 대구의 미래 설계는 이런 긍지로 가득 찬 '대구 역사'의 무게를 온전히 담아내야 할 만큼 거대하다.
대구가 다시 뛰고자 할 때, '광복회' 탄생의 배경을 되새김해 본다. 국권 회복과 독립을 갈망하던 청년들이 달성공원에서 광복회를 결성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대구에서 만나자'며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것이다. 대구 중심의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만주에 사관학교를 설치, 군대를 양성할 정도로 무장 독립운동의 중추 역할을 했다. 왜 하필 대구였을까. 그 답이 군위를 품은 대구가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데 실마리를 암시한다.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 넓은 평야가 발달해 있고, 영남대로가 지나고 경부선이 달리는 교통의 요지, 서문시장과 약령시가 번성한 대구는 사방으로 사람과 물산이 드나드는 한마디로 '열린 도시'였다. 조선 청년들이 '열린 도시' 대구로 모여 독립의 꿈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군위 편입으로 전국 최대 도시가 된 대구, 그리고 통합신공항의 비상과 사통팔달의 교통망은 '사람'과 '물산'이 모이던 100여 년 전 '열린 도시' 대구의 특징을 고스란히 닮아가고 있다. 다시, '대구에서 만나자'를 외치고 싶지 않은가.
대구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데에는 경북의 도움과 배려가 있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대구와 경북은 한뿌리라고는 하지만, 대구경북신공항 성공을 위해 경북 땅을 기꺼이 내준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결단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철우, 박정희 이후 TK 살린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될 것"(권영진 전 대구시장)이란 다소 넘치는 칭송은 '군위 편입 기념식' 날(7월 3일)의 맞춤형 미사(美辭)로 이해하면 될 터이지만, 그렇다고 영 엉뚱한 찬사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과업은 정치적 리더십과 선도적 행정이 성패를 갈랐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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