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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칼럼] 파락호의 비밀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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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파락호(破落戶) 김용환. 파락호란 놀고먹는 건달, 난봉꾼을 가리킨다. 일제 강점기 안동 명문가 의성김씨 종손이었던 김용환은 흥선대원군 이하응, 형평사 운동의 주역 김남수와 함께 조선 3대 파락호라 불렸다. 노름판에는 꼭 끼었던 그가 팔아먹은 땅만 18만평. 현 시가로 수백억 원 된다고 한다.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지만 학봉 종택마저 세 번이나 날려 먹었다. 시집간 외동딸에게 장롱을 사라며 시댁에서 준 돈까지 탕진했다. 인척들은 "집안 말아먹을 종손"이라 손가락질했다. 도박판에선 불량배들에게 죽도록 맞고는 판돈 전부를 빼앗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천상 개망나니였다.

반전이 있다. 그가 탕진한 돈이 고스란히 보내진 곳이 있었다. 바로 만주 독립군. 1946년, 임종할 무렵 독립군 하중환이 "이제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라고 하자 김용환은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눈을 감았다. 일경의 감시를 피해 노름꾼으로 위장하고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진실을 끝까지 묻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군자금을 조달하는 의용단 서기, 사후 드러난 그의 정체다. 노름판 돈을 가져간 도박꾼, 불량배들은 변장한 독립군이었다. 멸시를 받으며 죽는 순간까지 난봉꾼이라 불리기를 마다하지 않은 그의 처절한 고독이 경이롭다.

그의 할아버지 김흥락의 제자 가운데 독립운동으로 훈장 받은 사람만 60명 나왔다. 안동의 의성김씨 문중에서 106명, 이 중 학봉 직계가 11명. 대구 경북은 독립운동사에 가장 많은 유공자를 배출한 곳이지만 안동은 그중 우뚝하다. 독립유공자 수가 전국 평균의 10배, 시·군 단위로는 유일하게 300명이 넘는다. 8월 안동에서 공연될 '실경 뮤지컬 왕의 나라 시즌3'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김용환 등 안동 출신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한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많지 않다. 광복 후 50년이 지나서야 건국훈장이 추서됐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김희성(변요한 분)이 그를 모티브로 했다는 사실이 반짝 회자됐을 뿐이다.

사흘 전, 6·25전쟁 74주년 행사가 대구에서 열렸다. 지방 개최는 처음이다. 대구는 전쟁 초기 33일 동안 임시수도로서 대한민국을 지탱했다. 대구 경북 곳곳의 전투에서 값진 승리를 거뒀고, 이게 대한민국이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전환점이 됐다. 당시 대구경북에서만 3만5천명이 사망했다. 6천600여 명이 학살당했으며, 행불자만 2만7천여 명, 납치된 사람이 7천500여 명이나 됐다. TK의 명예는 '보수 본산'에 있지 않고 모름지기 '호국의 성지'라 칭함에 있다.

선열의 숭고한 피의 제단 위에 선진국 문턱에 막 다다랐다. 대한민국의 안보와 민주주의는 한 번도 안정적으로 지속한 적이 없다. 다시 누란의 위기 앞에 서 있다. 어쭙잖게 한미일 vs 북중러 대결의 첨병을 자임하다 최강의 군사대국들과 맞서는 상황을 자초했다. 이미 세계의 주류가 됐으면서 상황을 주도 못하고 마냥 변방 멘털리티에 젖은 결과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위대한지, 또 얼마나 취약한지. 북 비핵화는 완벽히 실패했다. 동맹 미국의 신뢰도 불안하다. 어이없게도 "미국은 한반도에서 북한과 전면전을 벌일 만한 군사적 자원이 없다"(콜비 국방부 전 부차관보)고 한다. 이런 비정상의 상황에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정상으로 사는 건 정상인가 비정상인가.
이재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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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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