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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2024-07-24

독도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장한상 장군도 보고 계실까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2010년 3월, 경북경찰청 헬기를 타고 찍은 독도 사진. 김재도 작가는 2014년 의성조문국 박물관에서 열린 장한상 학술대회 때 사진 전시를 함께했다. 김재도 사진작가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지역사를 기록해 오고 있는데, 누구보다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 그런 그도 학술 대회 때 처음으로 장한상 장군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기록에 자신의 기록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김재도 사진작가 제공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이왕이면 현지인 추천 민박집에 묵고 싶어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배를 탔던 여행 첫날 밤, 울릉크루즈의 조현기 상무가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대뜸 전화를 했다.

"교수님, 방 있습니까?"

바로 그 순간부터다. 일부러 각본을 짠다 해도 이 주연들을 한 번에 캐스팅하긴 힘들 것 같은 우연한 만남이 마치 끝말잇기라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이어졌다. 장한상 장군은 '울릉도사적'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다'는 짧은 기록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중요한 기록은 330년의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숱한 이야기와 인연을 더하며 섬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그 섬, 우리 땅 독도에 관한 이야기다.

한평생 독도 연구한 김병렬 교수
"독도는 명명백백한 한국의 영토"
지금은 울릉도 산 중턱서 민박집

청년단체 JCI, 매년 독도수호대회
어린이들도 함께 방문 산 역사교육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독도의용수비대가 라디오·TV도 없던 시절, 하루종일 독도를 지키면서 바위에 새긴 글씨 '한국령'. 김재도 사진작가 제공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독도경비대가 오가는 순찰로를 찍은 항공사진. 경비대가 다니는 길이 한반도 지형을 형상화하고 있다.김재도 사진작가 제공
◆만남 1. 독도 전면 개방의 숨은 공신 (A.K.A 민박집 주인)

"330년 만에 울릉도를 다시 찾은 셈인데, 오늘 울릉도에서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순간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괜찮다는 데도 굳이 큰 도롯가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민박집 주인은 장한상 장군의 '후손'이 아니라 마치 330년 전의 장군을 만난 듯이 질문을 했다. 그의 시계에선 장한상 장군이 수토관으로 파견된 1694년이나 장군의 후손들이 울릉도·독도를 여행 삼아 오는 2024년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 느껴졌다.

"여전히 일본과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올 초에도 일본 가미카와 외무상이 연례 외교연설에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또 망언을 내놓았잖아요? 일본 국제법학계가 이런 주장의 정책적 토대를 제공해왔는데, 국제법상으로는 꽤 탄탄하게 물밑작업을 해왔거든요."

갑자기 바짝 긴장됐다. 이 민박집 주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에서 국제법 강의를 하면서 독도 관련된 연구서적만 무려 16권을 써낸 자타공인 독도 전문가, 그것도 국제법 전문가다.

"국제법이란 게 그래요.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당연히 우리 땅으로 판결난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일본 고지도나 역사 문헌에서 일본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한 사례들을 미리미리 찾아 정리해 놔야죠. 언젠가 정말 국제사법재판소에 가게 된다면 법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해놔야 하거든요."

순식간에 민박집 가는 길이 국방대학 강의실로 변신한 듯했다. 김병렬 교수는 일본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원어로 공부했고, 일본에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일어로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330년 전의 분쟁은 그저 옛일이 아닐 것이다.

"장한상 장군이 울릉도에 다녀가신 게, 1693년에 조선의 어부들과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거든요."

우리 국민이라면 이미 익숙한 안용복 사건. 당시 안용복은 일본 조정에 끌려가서도 '조선의 섬인 울릉도에서 조선인이 고기잡이 하는데 왜 납치해 왔냐'며 당당하게 항의했다.

"이 일로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가 발생했죠. 말 그대로 해역 경계를 놓고 한일 간에 분쟁이 붙었다는 말이거든요. 1694년에 장한상 장군이 수토사로 파견될 당시에 이 쟁계가 한창 극에 달했을 때인데 조선 조정에서도 움직이고 우리 어민들도 항의하자 결국 1696년에 일본은 자국 어민들이 울릉도로 출어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논쟁이 일단락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장선호 회장과 청년들이 함께 독도수호결의문을 낭독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오른쪽 끝에 선 장한상 장군의 후손들.
우리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명명백백한 한국의 영토. 그래서 지금 독도를 지키는 것도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주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인 것이다.

"그걸 '실효적 지배'라고 하는데 법령, 행정, 치안 같은 공권력으로 이미 우리가 독도를 실제로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 국민이 가서 살고, 365일 독도를 오가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2005년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발의하자 우리 정부는 '독도 전면 개방' 정책으로 맞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연보호구역으로 닫혀 있던 독도를 전 국민이 쉽게 오갈 수 있도록 개방한 것이다. 당시, 김병렬 교수는 청와대 독도대응팀장이었다. 실제로 정책이 실행되기까지는 여러 부처 사이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독도 입도 허용 인원을 해마다 늘려나갔다. 동시에 동북아역사재단 초대 독도연구실장으로 독도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그 장구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울릉도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그의 민박집에 다다랐다(독도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울릉 민박 '선녀와 나무꾼'을 예약하면 된다).

"여기가 이제 제2의 고향입니다. 제가 한평생 타지에서 독도 연구를 했는데, 와서 한번 살아봐야죠. 독도에 살 순 없으니 그나마 가까운 여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자, 여기서 하룻밤 묵고 우리도 이제는 독도를 온몸으로 느껴볼 차례다.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만남 2. 수십 년째 독도를 지키는 청년들 (feat. 5살 꼬맹이)

"오늘 독도 가는 배는 만석입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얘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민박집을 나서며 오늘은 날이 맑아서 독도 입도가 무난할 것 같다며 좋아했는데, 장군의 후손들 얼굴에도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배 하나를 거의 통째로 예약한 단체관광객이 있다고 했다. 다른 항구로 가봐야 하나. 발길을 돌리던 그 순간이었다.

"아, 잠시만요, 몇 분이라고 하셨죠? 지금 막 취소 표가 들어왔는데…"

그렇게 우리는 출항 5분을 앞두고 거의 뛰다시피 가까스로 배를 탔다. 어쩌다 보니 예의 그 '단체관광객'과 한배를 탄 셈이다. 배 안은 이미 태극기로 출렁였고 네댓 살의 천진한 아이들은 태극기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청년단체 JCI가 1년에 한 번 독도수호결의대회를 하는 날, 그날이 마침 오늘이었던 것이다.

"2005년 3월16일.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키면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했잖아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그 며칠 후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기자회견을 했는데, 우리 국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독도에 입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그 뉴스를 보고 당장 회원들이 모였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 해 오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독도에 가려면 울릉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또 여객선도 따로 없어서 주민들 어선을 직접 섭외해야 했다. 경북지구JC 박준걸 기획조정실장은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어이 왔던 독도인데 요즘이야 꽃길이라고 했다. 역사와는 거리가 멀 것처럼 생긴 이 젊은 청년들에게 독도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

"오늘 온 애들 중에 제일 어린 애가 4살? 5살? 그 정도인 것 같은데, 그 아이들은 독도가 뭔지도 모를 거예요.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매 해 업고 안고 여기를 오니까 그냥 이맘때쯤이면 독도에 오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그게 저는 역사라고 봅니다. 뭐 일본이 백 번 교과서에 저거 땅이라고 해봐야 뭐합니까? 우리 애들이 이렇게 해마다 자유롭게 와서 뛰어놀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 청년들이 우리 땅 독도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렇게 도착한 독도에서 장군의 후손인 장선호 회장과 장수용씨도 청년들 속에 섞여 독도수호결의문을 낭독했다. 멋모르고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에게 장한상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특별한 식순도 넣었다.

장한상 장군도 보고 계실까. 이곳은 독도. 330년 전 장군이 울릉도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 섬에 오늘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우연 같은 필연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330년 전 장군이 준비해두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독도 이후, 장군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글·사진=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공동기획: 의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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