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10월28일 새벽 2시 대구 한 대학병원 풍경
지난 28일 새벽 2시, 대구 한 대학병원. 병원의 불빛이 어둡게 깜빡인다. 한때 분주하던 응급실의 기계음은 낮아졌지만, 피로에 젖은 얼굴들은 여전히 긴장 속에 있다. 이곳에선 매일같이 생명이 오간다. 그런데, 익숙했던 손길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의사복을 걸친 전공의들, 차트를 들고 뛰던 인턴들의 모습은 사라진 풍경이 돼 버렸다.
"여기서 그들이 떠난 뒤로 아무것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한 의사의 말 속에는 무거운 피로가 스며 있다. 이제는 남은 인력들이 그 빈자리를 억지로 채워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공백은 점점 커지고, 모든 것이 더디게 움직인다. 진료 대기 목록은 끝이 없고, 수술은 연기된다. 환자들은 기다리며 불만을 터뜨리고, 남은 의료진들은 고개를 숙인 채 하루를 버텨낼 뿐이다.
한 병동 간호사가 새벽 순찰을 돌며 홀로 중얼거린다.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요?" 그 작은 목소리는 텅 빈 복도를 타고 메아리친다. 적막은 이어지고, 피로가 쌓여간다. 이곳의 고단함과 멈춤은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으로 시작됐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발표 이후 갈등은 깊어졌고, 병원은 위태롭게 돌아가고 있다. 숫자로 채워지지 않는 공백, 정책으로 메워지지 않는 피로가 매일 병원을 잠식해 간다. 사직서를 내려놓은 전공의들은 돌아오지 않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저 매일의 시간을 견딜 뿐이다.
전공의들 떠난 전국 의료현장
사태 장기화에 과로·피로 누적
필수·지역 의료 붕괴도 가속화
"의대 정원확대, 근본해법 안돼"
의료계·전공의 강한 반발 지속
시스템 전반 장기적 개혁 절실
누군가는 단순한 인력 문제라고 말하지만, 이곳에 남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단순하지 않다. 의사들의 사라진 손길은 곧 생명줄의 일부가 끊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무게는 의료진과 환자 모두의 마음을 깊이 파고든다.
전국의 전공의들이 집단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료 현장을 떠난 지 9개월이 지났다. 이로 인해 주요 병원들의 수술 일정이 지연되고 입원 병동이 축소되는 등 의료 시스템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의료진의 과로와 피로 누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으며, 의료 서비스 품질도 하락하고 있다.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를 통해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현장에서는 이러한 정책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필수·지역 의료의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국민 건강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실효성 있는 해법인가
정부는 지난 2월 의대 정원을 5년간 총 1만명 증원하고, 2025년부터 매년 2천명을 추가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 인력 확충을 목표로 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의료계와 전공의들은 이러한 정원 확대가 단기적인 해법에 불과하며, 의료 시스템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다.
의료계는 정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KDI, 서울대 보고서 등을 근거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했다고 주장하지만, 해당 보고서들조차 정부의 계획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일부 보고서에서는 의료 인력의 과잉 가능성까지 경고하고 있으며, 정원 증원이 의료 공백을 해결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미흡하다. 이에 대해 대한전공의협의회 박단 전 회장은 "필수의료과에 인력이 부족한 것은 인정하지만, 단순한 정원 확대는 답이 될 수 없다"며 "구체적인 의료 인력 수급 계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사 악마화 프레임'에 복귀 거부 확산
전공의들이 복귀를 거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정부가 만든 '의사 악마화 프레임'이다. 정부는 필수·지역 의료의 문제를 의사들에게 돌리며, 의사들을 이기적인 집단으로 몰아갔다. 이는 전공의들 사이에 환멸감을 불러일으키며 복귀를 가로막는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 조사에서는 87.4%의 의사들이 이 같은 악마화 프레임 때문에 복귀를 거부한다고 응답했다. 대한의사협회 오건룡 자문위원은 "정부가 국민 건강을 담보로 의사들이 협상한다고 몰아붙였다"며 "이러한 비난이 젊은 의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사들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 존재"라고 강조하며, 조용한 항의의 의미로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교육보다 노동에 치중' 수련 환경 문제
전공의들이 복귀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열악한 수련 환경이다. 현재 전공의들은 주당 80시간 이상의 과중한 업무와 36시간 연속 근무를 감당해야 하며, 교육보다는 병원 운영을 위한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대한전공의협의회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인턴의 75.4%가 주 80시간 이상 근무하며, 심각한 신체적·정신적 소진 상태에 놓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 전공의는 "교육과 근로가 반반이어야 하지만, 실제로 교육에 할애되는 시간은 5%도 채 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표했다. 정부가 근무 시간을 주당 60시간으로 줄이겠다는 시범사업을 도입했으나, 현장에서는 기존의 80시간 기준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의료계는 강력한 제재 없이는 근로 환경 개선이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전공의 수련 국가책임제' 도입 필요성
해외에서는 정부가 전공의 수련 비용을 전적으로 책임지며, 교육 중심의 수련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정부가 매년 수조 원의 예산을 투입해 전공의와 지도 전문의의 인건비를 지원하며, 병원이 아닌 교육을 중심으로 한 수련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수련 비용을 대부분 병원이 부담하면서 전공의들이 값싼 노동력으로 활용되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
대한의학회는 한국에서도 전공의 수련 국가책임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도 전문의 제도 강화를 통해 전공의들이 질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용범 대한의학회 수련교육이사는 "지도 전문의는 전공의 교육과 평가를 담당하며, 근무 환경 개선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 구체적인 예산 계획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다.
'전문의 중심병원 전환' 지방 의료 붕괴
정부는 전공의 의존도를 줄이고 전문의 중심의 의료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일부 병원의 일반 병상을 줄이고 중증 환자 중심으로 전환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의료계는 이 같은 정책이 자칫하면 지방 의료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대구지역 A 대학병원 교수는 "전문의 중심 병원으로의 전환이 빅5 병원에 인력을 집중시킬 가능성이 크다"며 지방 의료 인력의 부족을 우려했다. 그는 "병원의 병상을 30% 줄이고 진료 전달 체계를 정비해야 전문의 중심 체제가 성공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반면, 정부가 제시한 전문의 중심병원의 구체적인 운영 방안과 예산 마련에 대한 명확한 계획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MZ세대 전공의' 병원 대신 새로운 길로
MZ세대 전공의들은 불합리한 시스템에 순응하기보다 적극적으로 변화를 요구하며, 다양한 커리어 경로를 모색하고 있다. 이들은 낮은 임금과 과중한 업무에 실망해 병원을 떠나 미용 의료, 의료 관련 기업, 혹은 로스쿨 진학 등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있다. 한 전공의는 "인턴 시절 시급이 9천800원에 불과했다"며 "낮은 임금이 의료진의 불만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의료계는 젊은 의사들이 병원에만 묶여 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정부도 MZ세대의 요구를 반영해 근로 환경을 개선하고, 다양한 커리어 경로를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향후 과제와 의료개혁의 방향
정부는 최근 의료 개혁 4대 과제와 향후 5년간의 재정 계획을 발표했다. 의료계는 이번 발표에서 현장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기를 기대했지만, 다소 아쉽다는 반응이 많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정원 확대가 아닌, 의료 인력 배치와 교육 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해 필수·지역 의료를 강화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전공의들의 근로환경과 처우 개선 없이는 의료 공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부와 의료계 간의 진정성 있는 대화와 협력이 필수적이며, 이번 사태를 계기로 지속 가능한 의료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전공의 부재 사태는 단순한 인력 부족 문제가 아니라 의료 시스템 전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 사건이다. 정부와 의료계가 협력해 근본적인 해법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필수 의료와 지역 의료의 붕괴는 불가피하다.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대책이 아닌 장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강승규기자 kang@yeongnam.com
강승규 기자
의료와 달성군을 맡고 있습니다. 정확하고 깊게 전달 하겠습니다.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