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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안나 카레니나와 어머니

2024-11-07

[문화산책] 안나 카레니나와 어머니
고경아 (시인·경영학 박사)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마주한 것은 열두세 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비극적 사랑이 어느덧 고립되어 존재의 딜레마에 이른 그들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인간 본연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도덕적 의무를 드러내고자 한 톨스토이가 하필 이러한 현실을 가정해야만 했는지, 도무지 지루하기만 했다. 어른들의 이야기에는 설명이 필요한 것들뿐이었다.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들은 여러 면에서 유리한 점이 많은데, 막내인 필자도 또래보다 제법 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다. 책꽂이에는 손 닿는 대로 펼쳐볼 수 있는 다양한 책들이 이미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들면, 그 옆에는 두툼한 셰익스피어 전집이 놓여 있었고, 바오밥나무 싹을 뽑아내던 '어린 왕자'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그 주변 어딘가에 있었다. 무척 혼란스럽기도 했던 그곳은 결핍의 언저리에 있던 필자에게 필연적 관심사는 아니었을까.

한번은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한자로 '林巨正(임거정)'이라고 쓰여 있어, "왜 임거정이에요?"라고 질문을 드렸는데, "'꺽'이란 한자가 없어서 '거'를 대신 붙인 거겠지" 하셨다. '꺽'이라는 한자가 없는 이유를 한동안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불가능한 일에 무릇 연민하는 편인데, 아마 그때도 그랬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꺽'이라는 한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사실을 어머니께는 말씀드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사전이었다. 어떤 질문에도 답변은 부족하지 않았다. 구체적이거나 세세한 설명 같은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우주와 같았다. 어머니만 있으면 되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고서도 어머니는 여전히 여러 질문에 성실히 대답해 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날도 이 책 저 책을 무심히 뒤적이다가, '맛의 탐구'라는 큼지막한 글씨 아래, 계절 음식에 대한 메모가 빼곡히 적힌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아마 요리 프로그램 채널이 바뀔까 봐, 거기다가 급히 적으신 모양이었다. 서로 적잖이 놀랐고, 당황해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날 이후 어머니의 요리 메모는 어느 책에서도 다시 볼 수 없었다. 안나의 자유와 갈등이 겨우 필자의 내면에 부딪힐 즈음, 어머니는 더 이상 곁에 계시지 않았다.

어머니, 다시 오신다면, 필자의 시집에 대문짝만 한 메모를 아주 가득 채우신대도, 남기신 글자 하나하나 그 모든 흔적을 소중히 안아드릴 수 있을 텐데. 아, 어머니. 한 번만이라도 마주할 수 있다면.

고경아<시인·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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